진주성-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진주성-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11.09 18:1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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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은 위대한 유학자·사상가로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승문원 판교(判校)를 지낸 언형(彦亨)이며 그의 2남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남명은 호다.

부친의 임지를 따라 다니면서 학문을 배웠다. 19세 전후에 기묘사화 등으로 조광조등이 죽임을 당하고 숙부도 연루되어 피해를 당하자 인생무상을 느끼고 생사화복을 깊이 숙고(熟考)했다. 젊어서는 김해 신어산에 소재한 산해정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48세 때에는 삼가면 토동에 뇌룡정과 계부당을 건립해 제자들을 훈육하고 가르쳤다.

5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유명한 단성소를 명종에게 올려 사림(士林)의 기개를 높였다. 61세 때 산청군 덕산에 산천재를 지어 제자들을 훈육하고 양성했다. 제자들에게 성리학 뿐 만 아니라 천문ㆍ지리ㆍ의학ㆍ진법 등도 가르친 것으로 전해 온다.

67세 때 선조대왕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68세 때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려 대안을 제시했다. 72세 때 별세하자 “사람들은 진실을 숨기고 순박을 깨뜨려 세속에 아부하기를 공은 뜻을 굳게 지켜 끝내 변절하지 않았다”라고 하고 선조는 스스로 “소자(小子)는 어디에 의지하며 백성을 누구에게 기망하랴”라고 칭송제문을 내렸다.

광해군 때 문정(文貞)시호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했다.

남명 선생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 두 글자로 요약된다고 말한다. 선생의 문하에서 오건. 김우홍·최영경·하항·유종지·정구·정탁 등과 수많은 문인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곽재우·정인홍·전치원·조종도 등등 50여명의 의병장들이 임진왜란 때 활약했으니 어찌 소보라 하겠는가.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있는 덕천서원과 산천재·묘소가 국가문화재 사적 305호로 지정되었고 남명 선생의 문집 책판은 경남 유형문화재 164호로 지정됐다.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는 뇌룡정이 있는데 경남 문화재 자료 129호로 지정됐다.

산청군 덕산에 가보면 남명 기념관·묘소·여재실·세심정·산천재·신도비. 선조대왕 사제문·국역비·장판각·단성소 국역비 등이 있다.

금년 11월 10일 11일 양일간 산청군 덕산에 소재한 한국선비문화연구원에서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을 기리는 학술교류 심포지엄을 개최한다는 소식이다. 경상대학교 이상필·최석기 교수·연세대학교 허경진 교수 등이 강연과 발표를 한다.

<남명학파의 교육사상 연구>라는 제목의 채휘균의 영남대학교 교육학 박사학위 논문도 배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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