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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바람은 어디에서 오는가?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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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10  18:3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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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바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부채를 흔들면 바람이 생긴다. 그러면 이 바람은 도대체 어디서 생기는 것이냐? 이것이 철학적 주제이다. ‘중용(中庸)’에 ‘지풍지자(知風之自)’, 곧 ‘바람의 유래를 알다’라는 말이 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를 안다는 뜻도 되지만 대관절 바람이 어디서 어떻게 생기는지를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곧 만물의 근원을 안다는 뜻이다.

한국 철학사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성리학자(性理學者)를 꼽는다면 조선 중기 때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을 들 수 있다. 중중임금 때 당시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은거하던 학자들이 많으니까 조정에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중앙의 관리들과 지방 수령들에게 학행이 뛰어난 이들을 추천하게 했는데, 한성부 판윤으로 있던 김안국(金安國)이 화담의 나이 31세 때, 120명 중에서 1등으로 추천하였다. 그런데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아래의 내용은 김안국이 선물로 보낸 부채에 감사하며 보낸 답신의 글이다.

묻노니 부채를 흔들면 바람이 생기는데 바람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만약 부채에서 나온다고 말할 것 같으면 부채 안에 어찌 바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부채에서 바람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할 것 같으면 필경 바람은 어디에서 나온단 말인가? 바람이 부채에서 나온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고, 부채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허(虛)에서 바람이 나온다고 하면 도리어 부채와는 상관이 없고, 또 허가 어찌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부채가 바람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바람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바람이 고요하고 맑은 상태로 태허(太虛)에서 쉬고 있을 때에는 아지랑이〔야마:野馬〕나 티끌〔진애:塵埃〕이 일어나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채를 흔들자마자 바람이 바로 움직인다. 바람이라는 것은 기(氣)이고, 기는 천지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마치 물이 계곡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빈틈이 없다. 저 바람이 고요하고 담담한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바람이 모이고 흩어지는 모양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기가 어찌 빈 곳을 떠난 적이 있겠는가? ‘화담집(花潭集)’ 〈사김상국(안국)혜선(謝金相國(安國)惠扇)〉에 나오는 내용이다.

화담은 부채를 예로 들어 바람을 설명하면서 부채에서 바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부채가 태허의 상태에 있는 기(氣)를 움직여서 바람이 생기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기가 하늘과 땅 사이에 빈틈없이 가득 차 있는 것을 가정한 것인데, 마치 물이 계곡에 가득 차 있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서경덕이 태허(太虛)를 이야기하면서 허(虛)와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허가 바람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이야기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텅 빈 상태에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허와 달리 태허는 텅 빈 것이 아니라 기가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말한다. 가득 차 있는 기가 부채를 흔들면 바람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경덕이 말하는 태허즉기(太虛卽氣)는 온 우주가 기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화담선생이 58세로 임종을 맞이할 때 곁에 있던 제자가 “지금 선생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요?”하고 물이니 “죽고 사는 이치를 안 지 오래되었는지라 마음이 편안하다”라고 했다. 이는 흔치 않는 일이다. 인간은 원해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것이다. 즉 하늘의 뜻이다. 다만,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어서 어떻게 죽느냐가 특히 중요한 것이다.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도 편안하게 죽었다고 한다. “죽음을 맞이할 때 체온이 서서히 식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죽었다. 곁에서 소로우의 죽음을 지켜본 친구가 “그렇게 편안하게 죽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마도 화담과 소로우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선각자(先覺者)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화담선생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서 비어 있지만 가득 차 있음의 철학을 배우게 된다.

국가는 임기 5년의 공복(公僕)에 불과한 대통령의 소유물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오로지 ‘국민 모두의 것’이다. ‘순실이 바람’은 불어오는데 부채를 흔드는 손은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똥 냄새가 너무 너무 많이 나서 구역질이 난다. TV를 보다가 신문을 보다가 속엣 것을 결국은 토하고 말았다.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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