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기준
아침을열며-기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12.04 18:0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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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기준


철학에는 수백 수천의 흥미로운 주제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로 ‘기준’에 관한 논의가 있다. 나는 이것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예컨대 이른바 빈학단(비엔나학파라고도 함)의 ‘논리실증주의’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서 이른바 진정한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구획기준’이 논란이 된다. 그들은 이른바 ‘검증가능성’이 그 기준이 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영혼은 불멸이다’ ‘신은 존재한다’ 같은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검증 불가능하므로 과학적 명제가 될 수 없고, ‘물은 100도에서 끓고 0도에서 언다’ ‘지구는 자전하고 공전한다’ 같은 명제들은 검증가능하므로 과학적 명제가 될 수 있다는 식이다. 물론 칼 포퍼 같은 이는 이런 기준이, 그 검증의 도구인 귀납에 한계를 지니므로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면서 이른바 ‘반증가능성’을 그 대안으로 제시했다. 왜냐하면 ‘모든 까마귀는 검다’ 같은 명제는 소위 전수검사가 불가능하므로, 즉 ‘귀납’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반증사례’ 즉 ‘검지 않은 까마귀’가 제시되어 이 명제가 반박될 때까지 잠정적인 진리의 자격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지식시장에 의견의 형태로 명제들이 제시되고 그중 반론을 꿋꿋이 견뎌낸 것들이 한시적으로 진리의 자격을 갖는 셈인 것이다. 그러나 일단 반증할 수 있느냐 아예 반증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냐 하는 것은 의미가 있으므로 그게 과학과 비과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대학시절 이런 논의들이 꽤나 흥미로웠다.

그런데 기준의 논의는 비단 이런 것으로 다가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도 있다. 공자의 철학에 보면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라는 말이 있다. “부유하고 존귀한 것은 사람들이 다 바라는 바이지만, 도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가난하고 비천한 것은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바이지만, 도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면 거기서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부자가 되고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을 사람들이 다 추구하지만 그 수단은 ‘정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로써’(정당하게)라는 것이 그것을 추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의 윤리적-도덕적 기준인 셈이다.

이런 논의는 이밖에도 얼마든지 많다. 그렇듯 모든 판단과 선택에는 그때그때 ‘기준’들이 작용한다. 그것은 일률적이지 않다. 사안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바로 그래서 이게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그런 기준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지를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기준들은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힘이고 그리고 그것은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그 사람의 가치관을, 즉 정체를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 유명한 맹자의 경우를 보자.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만났을 때 혜왕이 그에게 말했다.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선생께서 불원천리하고 와 주시니 또한 장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게 있으시겠지요?) 그랬더니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왕께서는 왜 하필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어짊과 의로움이 있을 따름입니다)” 워낙 유명해서 사람들은 무심코 이 말을 듣고 넘기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 혜왕과 맹자의 판단기준 행동기준이 다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혜왕의 기준은 ‘이로움’이고 맹자의 기준은 ‘어짊과 의로움’이었다. 그렇게 그 기준이 다른 것이다. 거기서 혜왕과 맹자의 차이가 드러난다.

그러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기준은 어떤가.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선택과 행동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의 이로움, 우리 패거리의 이로움, 돈, 권력, 출세, 인기…’ 그런 것 말고 또 어떤 기준이 우리의 내부에서 (나의 내부에서, 우리 사회의 내부에서) 실질적인 힘으로서, 강력한 힘으로서 작용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움 없이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을까? 아니, 사람들은 적당히 속여 넘긴다 치더라도, 이른바 염라대왕이나 혹은 전지전능한 신에게 그걸 떳떳이 드러낼 수 있을까? 매일매일 언론에 보도되는 사건들을 보면 사람들의 그 판단기준 행동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 의아함을 넘어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나의 기준으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한국사회와 이 2016년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철학적-윤리적 기준론을 수능에 필수문제로 출제하면 어떨까, 그렇게라도 ‘가치’라는 걸 좀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도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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