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墓碑銘)
묘비명(墓碑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1.02 19: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기식/진주 상봉동동 문화위원
무덤 앞에 세우는 돌비석에 죽은 사람의 신분인 성명, 행적, 출생, 사망의 일자, 장지명 등을 새겨 묘앞에 세우는 묘석 또는 무덤돌이라 한다. 퇴계 이황(1501~1570)이 계상서당(溪上書堂)에서 운명전에 훈계(訓戒)한 내용 중 자명(自銘)을 다음과 같이 남기셨다.

‘생이대치 장이다질: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고 커 가면서 병통도 많았구나, 중하기학 만하도작 : 중년에는 어이해 배움을 즐겼으며 만년에는 어이해 벼슬을 받았던고, 학구유막 작사유영 : 배움은 찾을수록 더욱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할수록 더욱 불어나더구나, 진행지겁 퇴장지정 : 나아가 일함에는 실패하고 물러나 갈무리함에는 뜻을 지켰으나, 심참국은 단외성언 : 나라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성인말씀에 참으로 두려웁구나, 유산외외 유수원원 : 산은 높고 높으며 물은 솟아나서 끊임이 없는데, 파사초복 탈약중산 : 벼슬 전 평민 옷을 너울거리며 온갖 비방 훌훌 벗어 버렸으나, 아회이조 아패수완 : 내 그리운님 길이 막혔으니 나의 패물 누가 봐줄거나, 아사고인 실획아심 : 옛 사람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나의 마음 쥐고 있었지만, 영지래세 불획금혜 : 나는야 어찌 오는 세상을 알수 있으리오 지금의 눈앞도 잡지 못하는데, 우중유락 락중유우 : 근심 속에 즐거움 있고 즐거운 가운데 근심 있는 법, 승화귀진 복하구혜 : 조화타고 다함으로 돌아가는데 다시 무었을 구하랴’, 예안현(현 안동시 예안면) 도산면 상계동 뒷산에 묘소를 조성하고 남기신 분부대로 크지 않은 자연석에 새겨 묘비가 세위졌고 5일장으로 거행했다. 조선시대 왕족과 양반 묘지명이 많다. 영조(1724-1776)가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명도 있다. ‘끝내는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던 말인가’ 아들을 죽인 자신을 변호 하면서 동시에 자책하는 심정도 읽을 수 있다.

김광규의 시 묘비명은 유명문인이 거짓말로 쓴 권력자의 묘비를 비아냥 거렸다. ‘이 묘비는 살아남아 /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가록하며 /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묘비명에 남긴 권력과 재산을 얻으려고 탐욕에 빠지기 쉬운게 인생이다. 지도층 일수록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을 묘비명을 미리 써놓고 평생 실천하다가 떠나는건 어떨까 묘비명이 조롱거리가 되어서는 안될것이다.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 이제 어머님 심부름을 다 마치고 /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조병화(1921~2003) 시인은 어머니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곁으로 돌아간다고 노래했던 것이 2003년 시인이 세상을 뜨자 묘소에 묘비명 시비가 세워졌다.

소파 방정환(1899~1932) 선생은 어린이날을 만들기 전에 많은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천덕꾸러기 대우를 받았다. 어린이라고 불리게 된것도 그분 덕택이다. 서른세살에 돌아가신 방정환 선생님의 묘비에는 이런글이 적혀있다. “童心如仙”은 어린이의 마음은 천사와 같다는 뜻이다. 1956년 법령에 의하여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1976년부터 공휴일로 되었다. 아동문학가이다.

옛날에는 무덤의 형태가 바뀌어 누구의 묘인지 알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묘비명을 만들어 묘지 속에 넣어두었다. 장방형으로 만든 두 개의 돌에 한 개의 돌(銘)은 좌우명이나 공적을 새긴글이고 다른 한 개(誌)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 죽은 날짜 무덤의 좌향 등을 적어 두 개의 돌을 합하여 관 앞에 눕혀 놓는다. 마치 지문은 전(傳)과 같고 명은 시(詩)와 같다. 지금은 조그마한 돌에 이름 석자를 적어 알리기도 하고 백비(白碑)를 세워 묘의이름을 아리기를 꺼려하는 사람도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