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가을에 떠난 친구
도민칼럼-가을에 떠난 친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12.18 18:3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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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장섭/전 합천교육장
 

임장섭/전 합천교육장-가을에 떠난 친구


지난여름은 유례없는 무더위였다. 그야말로 돌도 녹아내릴 듯한 끔찍한 더위였다. 그래서일까? 찾아온 가을은 풍요로웠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단풍을 선사했다. 모든 잎이 꽃이 되어 제2의 봄이 온 듯 울긋불긋 오색찬란했다. 익어가는 가을, 단풍의 향연에 행복해하며 모두들 산과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 좋은 가을에 나는 여러 날을 가슴앓이하며 집안에 박혀있어야 했다. 그것은 친구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0월15에 세상을 떠났다. 인생은 절대로 무한한 것이 아니라고도 하고 누구도 생로병사는 피해갈 수 없다지만 허탈감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컸다. 더구나 불과 몇 시간 전에 문병을 다녀온 나로서는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허탈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장례식장에 갔다. 그날따라 가을답지 않게 장대비가 내렸다. 친구의 영정 사진이 나를 맞이했다. 그에게 술잔을 부어놓고 절을 올렸다. 망자가 된 친구에게 술잔을 올린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결혼 하지 않은 두 아들과 사위에게 뭐라고 위로를 해야 도리이지만 손만 잡았다. 붕성지통(崩城之痛.남편을 여윈 아내의 슬픔)이라했던가! 혼절한 친구의 아내에게는 바로 처다 보지도 못하고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도 못한 못나니였다. 그런 나를 망자의 여동생이 오히려 위로를 하였다. 평소 그녀는 오빠를 위하고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모습을 보고 천사가 아니고서야 저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친구들이 모여 망자에 대한 애기를 주고받으며 먼저 간 친구의 명복을 빌었다. 다를 좋은 친구 갔다. 이제 우리들도 얼마 남지 않은 삶이지만 건강관리 잘 하자는 얘기가 많았다. 누구는 저 세상에 갔는데 우리는 술잔을 들고 음식을 먹고 있구나. 아! 이게 산자와 죽은 자의 차이다하는 생각을 하였다.

망자를 뒤로 하고 귀가하며 장대비 같은 눔물을 흘렸다. 그 친구와의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동갑이라는 인연으로 만나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고 대화도 많이 나눴다. 시쳇말로 죽이 맞았다.

늘 운동을 가게 되면 같이 가자고 들리곤 했었다 .그는 주유소를 경영해 들려서 대화하기에 좋은 공간이 있었다. 고개만당이라 쉬어가는 명당같은 그런 곳이었다. 아니 그가 사람들에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이 사람을 불러들인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싶다..

내가 정년퇴직을 하고 난 후로는 거의 매일 만났다. 어쩜 집사람 다음으로 얼굴을 많이 본 사람이다. 어쩌다 내가 하루라도 그르게 되면 무순 일이 있느냐고 전화를 하였다. 그렇게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만나면 우리는 이내 남정강 고수부지를 걸었다. 시원스런 강을 사이하고 걷는다는 것은 늘 기분을 상쾌하게 하였다.

봄이면 싱그러운 풀냄새와 밤의 소쩍새소리를 들으며 우정의 꽃을 피웠다. 여름의 더위가 몸을 후덥지근하고 칙칙하게 해도 우리에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걷는 낭만도 일품이었다. 가을은 시원한 바람이 귓전을 간질이고 활동하기에도 좋고 풍요로운 계절이라 그런지 농사일을 비롯한 세상사 애기가 가장 풍성하였다. 특히 자녀들의 혼사얘기가 많았다. 마음 아프게도 그는 아직도 두 아들의 혼사를 보지 못하고 갔다. 가을의 달빛아래 유유히 흐르는 남정강의 반짝이는 물빛은 환상적이었으며 발길에 서걱거리는 단풍은 우리의 우정을 채색하고 쌓아두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강변의 겨울은 차갑지만 벌거벗은 나목(裸木)가로수를 사이하고 걷는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 그와 함께 많이 걸은 날과 길이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가을 해본다.? 불가에서는 하루 길을 동행해도 2천겁의 인연이라 했는데 말이다.

우리는 음식을, 특히 고구마를 같이 많이 먹었다. 가을부터 난로위의 작은 무쇠 솥에 구운 고구마를 이듬해 4월까지의 간식으로 먹었다. 야심한 밤에 군고무마 먹는 재미는 신선인들 샘하지 않았을까! 군고구마에 홍시를 곁들이는 맛은 먹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라. 사람들이 화목(和睦)이라는 말을 많이 즐겨 쓴다.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화목할화(和),화목할 목(睦)이다. 벼화(禾)와 입구(口) 눈목(目)과 언덕 육(坴)이다. 사람은 같이 자리해서 눈을 마주보며 곡물을 목구멍에 넣으면 즉 눈을 마주보고 음식을 같이 먹으면 화목해진다는 의미가 아닐까싶다. 그래서 친하게 사이좋게 지내려면 음식을 같이 먹는 것 이상의 것은 없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물론 진실하지 않는 자(者)와는 같이 밥을 먹지도 말아야하지 않을까?.

그는 사회현상에 대해 밝았다. 정보도 빨라서 세상사의 일들을 많이 들려주곤 했다. 그는 주장을 하되 도를 넘지를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낯을 붉히는 언쟁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고맙게도 잘 챙겼다. 모임에 가서도 내가 보이지 않거나 집에 좋은 음식이 있는 날에는 꼭 전화를 했다. 그런가하면 내가 글을 써서 문학지나 신문에 기고를 했을 때 소감과 덕담을 빠뜨리지 않았다. 시조창에 한창 재미를 붙여 전국대회에 돌아다니며 수상을 하면 잘했다는 말 한마디가 고마웠고 힘이 되었다.

그런가하면 총동창회장을 맡았을 때는 임원들에게 친구 많이 도와주라며 협찬금을 건네주는 친구였다. 이렇게 나를 인정하고 알아주기에 시조창과 글쓰기에 소홀하지 않고 매진하지 않았을까싶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사위지기자사, 여위열기자용(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다듬는다)이라하지 않았던가!

그는 고향가회친구들에게 꼭 있어야할 존재였다. 동창회장을 수년을 하면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에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자주 경향각지에 있는 친구들이 안부전화를 하고 특히 여자 동기들의 많은 전화에는 부럽기조차 하였다. 동창회장을 내놓고 싶어도 물려받을 사람이 없다며 허허! 웃는 모습이 아련하다.

이제 49제도 지냈다. 친구가 저 세상에 갔기에 ‘사람은 혼자라는 시간을 잘 견디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누가 그랬던가! 나무와 사람은 넘어져봐야 그 크기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부처님께서도“좋은 친구를 가졌다는 것은 깨달음의 반을 이룬 것이 아니라 전부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친구 윤창섭! 그는 갔다. 그러나 그가 떠났다고 해서 친구가 없어진 게 아니다. 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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