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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열며-탈의 철학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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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30  18: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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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탈의 철학

‘21세기 한국의 지(知)’를 위해 이런 철학을 나의 선물로 남겨두고 싶다. 이름하자면 ‘탈의 철학’이다. 이것은 삶의 일부에 기여하는 ‘지적인 유희’의 하나로 유용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철학인 이상 이 유희에는 유희의 탈을 쓴 윤리가 숨어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철학의 영원한 주제다. 이 물음에 대해 나는 대답한다. ‘인간이란 얼굴이다.’ 물론 이 말의 지적 소유권은 저 레비나스에게 있다. 그러나 그와 무관하게 나는 이것을 나의 언어로, 나의 철학으로 채택한다. 인간이 왜 얼굴이냐고? 삶의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때 그 삶을 영위하는 ‘나’의 실질적-대표적인 ‘모습’이 얼굴이기 때문이다. 거기엔 희로애락 등 온갖 감정이 반영된 ‘표정’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얼굴에는 크게 ‘민낯’과 ‘탈’ 두 가지가 있다. 대인관계에서 우리는 거의 대부분 탈을 쓰고 산다. 그 탈은 상대와 상황에 따라 수백 수천 가지로 달라진다. 따라서 사람의 얼굴도 수백 수천 가지가 된다. 우리는 출근할 때마다, 외출할 때마다, 넥타이를 고르고 옷을 고르듯이, 그때그때 적절한 탈을 골라서 쓴다.
이른바 ‘탈쓰기’는 무한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다양성을 개척해 나간다. 저 ‘화장’도 ‘보톡스 시술’도 ‘주름제거’도 ‘성형수술’도 그리고 ‘포샵질’도 다 일종의 탈쓰기다. 그 결과가 저 ‘양두구육’ ‘인면수심’ ‘표리부동’ ‘지킬과 하이드’ ‘천개의 가면’이 되기도 한다. 범위를 좀 확대해서 해석하자면 ‘옷이 날개’라는 말도 결국 탈쓰기의 결과다. ‘옷’은 ‘온몸으로 입는 탈’이기 때문이다. ‘브랜드의 소비’도 그런 탈쓰기의 일종이다. 누더기를 걸친 나와 명품으로 감싼 나는 나를 대하는 타인의 태도는 물론 나 자신의 태도까지도 바꿔 놓는다.

탈 쓰기의 양상이 다양한 만큼, 탈 자체도 또한 무한의 다양성을 지니다. 하회탈, 봉산탈, 선비탈, 각시탈, 일본의 ‘노멘’(能面), 서양의 무도회 가면…등등이 다양하듯이, 인간이 얼굴을 가리는 ‘무형의 탈’도 다양하기가 그지없다. 그것은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사람이라도 자식 앞에서 쓰는 탈과 유권자 앞에서 쓰는 탈과 이성 앞에서 쓰는 탈과 권력자 앞에서 쓰는 탈은 각각 달라진다. 경우에 따라 사람은 여우의 탈을 쓰기도 하고 사자의 탈을 쓰기도 한다. 사기꾼들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탈’을 쓰고 사기를 친다. 또 누군가는 ‘친구’라는 탈을 쓰기도 한다. 또 신분에 따라 각각 달리 써야 할 탈들도 있다. 그렇게 다양한 만큼 탈에는 당연히 ‘좋은 탈’도 있고 ‘나쁜 탈’도 있다. 부모 앞에서의 자식의 ‘애교’도 일종의 탈인데, 그런 건 좋은 탈이다. 심지어 프로이트가 말하는 ‘윤리’ ‘도덕’도 원초적 욕구에 반하는 것이므로 일종의 탈인데 그것도 좋은 탈이다. 그것은 ‘자아’의 ‘사회적 얼굴’이 된다.

대개의 탈은 가짜다. 그것은 나의, 인간의, ‘민낯’을 가려준다. 온갖 부끄러움도, 온갖 취약함도, 온갖 추악함도, 흉악함도 다 가려준다. 그러나 그런 가짜 탈, 나쁜 탈은 ‘탈’을 피하려고 덮어쓰지만,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탈’을 낸다. ‘탈’이 난다. 그래서 그 정체를 탈탈 털리게 된다. ‘덮어쓴 탈은 벗겨진다’ 그건 원리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있다. 애당초 가짜인 탈이, 얼굴의 모조품인 탈이, 어느샌가 알게 모르게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얼굴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보드리야르가 말해주는 ‘시뮐라크르’처럼 모조품인 가상실재가 버젓이 실재로서, 심지어 극실재로서, 행세하고 통용되는 것이다. ‘민낯’은 오히려 추방되고 상실된다. 살다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혹은 탈쓰기에 지치는 순간, 사람은 그 탈을 벗고 싶지만 그 탈은 이미 민낯을 대체한 얼굴 그 자체가 되어버렸기에 좀처럼 벗겨지지가 않는다. 살기 위해서 사람은 자기를 그 탈에 적응시킨다. ‘어른의 얼굴’이라는 탈이 그런 것이다. 그 탈 안쪽에는 대개 아직도 ‘소년소녀의 얼굴’이, 아니 그 이전의 저 ‘아이의 얼굴’이 가려져 있다. 그래서 어른은 저 탈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탈은 때로 긍정정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즉 그것이 용기를 주기도 하는 것이다. 줄리엣에게 다가가 사랑을 고백하게 한 로미오의 가면, 진짜 실력을 돋보이게 하는 저 ‘복면가왕’의 가면, 일제 침략세력을 응징하는 저 드라마의 ‘각시탈’도 그런 경우다. 또 저 가면파티의 가면들도 그런 경우다. 그런 것들은 말하자면 ‘일탈의 희구’이기도 하다. 누가 그런 탈쓰기를 나무랄 수 있으랴.

그러나 아무리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탈은 결국 탈이다. 그것 자체가 얼굴일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궁극의 민낯’이 있다. 그게 ‘나’이고 ‘자아’이고 그 실체는 결국 ‘순수욕구’다. 그 어떤 탈도 그것을 가릴 수는 없다. 아무리 탈을 써도 우리는 민낯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그리움과 궤를 같이 한다. 순박한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과 삶을 그린 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그분들의 그 ‘민낯’ 때문이었다. 아무런 탈도 쓰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사람의 얼굴’ 그것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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