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대장쟁이(冶工 鐵匠)
진주성-대장쟁이(冶工 鐵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2.08 17:26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대장쟁이(冶工 鐵匠)


대장간에서 쇠를 달궈서 온갖 연장 따위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통속으로 이르는 말로 철장 야공이라고 한다. 금속에 다른 물질이나 금속을 합금하는 기술은 생활과 산업에 두루 쓰이고 있다.

우리 조상은 예로부터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찬란한 금속문화를 이룩했다. 고조선 시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든 청동거울 고구려의 검, 갑옷, 백제의 금동대향로 신라의 금관 고려의 금속활자 등 우리 조상의 금속을 다루는 솜씨가 대단히 우수했음을 증명해 주는 유물이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규모와 기술을 갖춘 제철소와 제련소등 공장에서 철과 다양한 합금을 만들고 있다. 옛날에는 대장간에서 철, 구리, 주석 등 금속을 달구고 두드려 연장과 기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장간에서 불을 이용 금속으로 다양한 연장과 기구를 만드는 장인이나 기술자를 대장쟁이라고 불렀고 우리 역사의 기록으로는 최초 대장쟁이가 삼국시대 신라 제 4대 왕인 석탈해로 대장쟁이가 어떻게 왕이 됐을까?

탈해왕은 왜국 다파나국의 소생으로서 난생(卵生)으로 신라 아진포에 표류하여 고생한 사람으로 바닷가에 도착 물고기를 잡던 할머니가 탈해를 발견 경주 토함산에 올라 경주땅에서 자신이 머물 곳을 찾았다. 그러다 초승달 모양의 터 신라 궁궐이 있는 월성(月星)을 발견 그곳에 정착했다. 월성에는 이미 호공(귀화한 오랑캐인)이 살고 있었다.

탈해는 호공 집 주위에 숫돌과 숯을 몰래 묻고 며칠 후 집으로 찾아가 “이곳은 우리 조상이 살았던 곳”이라고 우겨 호공은 관아에 이 사실을 아뢰고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가려내기 위하여 관아가 나와 탈해에게 “무슨 증거로 이곳이 네집이라고 주장하느냐”고 묻자 탈해는 “우리 집안은 대대로 대장쟁이였고 이 땅은 우리가 대장간을 했던 곳”이라며 “내가 잠시 다른 지방에 가 있는 사이 남이 들어와 산 것으로 집 주변을 파보면 그 증거물이 나올 것이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호공의 집 주변을 와보니 탈해가 묻어둔 숫돌과 숯 부스러기가 나왔다. 관리는 호공에게 집을 양보하라했고 탈해의 집이 됐다.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탈해를 중심으로 모인 석씨(昔氏) 부족이 어로(漁撈)를 주요 생활수단으로 하면서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탈해가 철을 다루는 능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후에 제 2대 남해왕의 사위로 있다가 4대 왕이 되었다. (재위23년) 전설적인 왕임 당시 신라에서 철은 지금의 형상기억 합금처럼 첨단 금속소재였고 쇠를 다루는 기술은 지금의 반도체 생산 기술만큼이나 최첨단 기술로 볼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