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국채보상운동과 일진회
진주성-국채보상운동과 일진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3.21 18:0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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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국채보상운동과 일진회



1907년(융희1) 경향(京鄕)의 관리와 민중들이 모여서 일본에 대한 국채(國債)를 갚으려고 조직한 단체로서 당시의 일본에 대한제국의 외채는 무려 1300만원으로서 국가의 재정으론 도저히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국가는 국가대로 일본자본에 예속되었으며 민간은 민간대로 일본 자본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이 약점을 이용 대한제국의 정권을 농락하자 이 상태로는 도저히 자주적인 갱생이란 생각할 수 없다는 반성이 민중 속에서 일어났다.
이 운동의 선구자는 대구에 살고있는 서상돈(徐相敦)과 김광제(金光濟등 일본에 대한 정부의 빚을 갚자는 주장을 내세워 많은 사람의 공명(共鳴)을 얻게 되고 이에 호응해서 국체보상 금연기성회가 조직되어 황성신문사 대한매일신보사 보성사를 본부로 하여 각지에서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백성들의 호응을 받아 부녀자들은 금 은 장식품을 시골농민들은 땔나무 판돈까지 내놓았다.

이 운동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송병준(宋秉俊)등 지휘하던 일진회(一進會)가 방해공작으로 중지되어 버렸다.
일진회는 대한제국 말의 친일정당으로 일찍이 민씨 일파의 박해를 받아 10년간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이 러일전쟁때 일본군의 통역관으로 귀국 일본군의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꾀하더니 1904년 8월 18일 구 독립협회의 잔당인윤사병등 유신회를 조직 다시 일진회로 개칭 회장에 윤사병을 추대 회 발족과 동시에 왕실존중, 인민의 생명과 재산보호, 시정의 개선, 군정 재정의 정리 등 4대강령을 내걸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면서 회원은 모두 단발과 양복차림을 하는 등 문명의 개화를 급격히 서둘렀다.

일진회는 우리민족의 애국운동에 대항하였고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하였으니 바로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에 대해 매국적 저지운동을 했으며 친일적 망발을 폈고 이완용을 통하여 내막과 결탁 송병준이 농상공 대신으로 입각 고종의 양위를 강요했다. 1907년 마침내 고종이 양위하게 되고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에 의병이 일어나 일진회원들을 토살했으며 1909년 10월 이등박문이 하르빈에서 암살한 후부터는 더욱 매국행위에 열을 띤 한일합방안을 융희황제에게 상주(上奏)하고 각하되면 다시 올리면서 광분하였다. 이에 당시 전민족적인 감정을 대변하여 중추원의장 김윤식 등이 송병준 이용구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일제의 비호로 뜻을 못 이뤘고 1910년 8월 22일 망국의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니 이해 9월 26일 일진회는 7년여에 걸친 매국적 소임을 다하고 해체하였다. 사상운동은 지하에 숨어 명맥을 유지했으나 국권회복 앞에 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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