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유림(儒林)
진주성-유림(儒林)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4.18 20:1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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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유림(儒林)


유림은 사림이라 하기도 하고 유도(儒道)를 닦는 학자를 말하며 조선조7대왕 세조때에 두파로 갈려 김종직(金宗直1431-1492) 정여창(鄭汝昌 1450-1504)등 영남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사림파 9대 성종때부터 정계에 뿌리박고 있던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중반 이후 성장한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사족(地方士族)이며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서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기 위하여 생겼으며 소극적인 훈구파와 진보적인 사림파라는 근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훈구란 말이 중요한 공로를 세운 나이 많은 신하라는 의미의 원훈구신(元勳舊臣)의 준말임을 뜻하고 훈구가 높은 관직을 차지한 대신 사림은 삼사(三司:사간원 사헌부 홍문관)등 문필을 담당한 인물로 볼 때 이들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사림의 총장은 김종직으로 보고 있지만 훈구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한명회(韓明澮 1415-1487)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될 것이다.

사회계층의 기반이 같았던 훈구와 사림은 시대적 역사적 역할에 관한 특성이 확연이 구분된 것으로 보고 있다.

훈구파는 정치면에서 중앙집권적인 동시 사림파는 향촌자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훈구파는 대지주 사림파는 중소지주를 초야에 묻혀 성리학에 몰두했던 학자들이 서서히 일어나 길재(吉再1353-1419)의 학통을 이어 받은 이들은 성종대에 뿌리가 내리기 시작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무오사(史)화(연산군1497)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폐위사건 갑자사화(연산군1503) 조광조의 숙청사건 기묘사화(중종1519) 왕자문제로 외척간의 반목 을사사화(명종1545) 4대사화로 인하여 사림파들이 거의 몰살당하여 유학이 쇠퇴하고 기강이 문란하였다.

소수인의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니고 파당을 가진 다수인의 논쟁이 따르는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는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고 목숨을 잃었고 승리하며 이에 대해서 새로운 반대파가 또 생겨 그것이 사화를 빚어내었다. 이러는 동안 정치기강이 더욱 문란해지고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을 버리거나 이에 관직을 단념하고 서원을 세워 유생들의 집합장소로 삼는 동시에 그들 일족의 자녀교육을 실시하고 이를 통하여 동족적인 당파의 결합을 굳게 하였다.

이와 같이 사화에 의하여 육성된 정치비판과 반대파에 대한 복수관념은 서원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당쟁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 조신(朝臣) 및 학계의 반목 세력 다툼 등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들이다. 세조이후 성종에 이르는 사이에 형성된 정의파 (훈구)와 청담파(사림)의 상호 반목으로 세력 다툼에서 비롯한 참화(慘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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