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와 유럽문화 가교 역할 윤이상
아시아와 유럽문화 가교 역할 윤이상
  • 백삼기기자
  • 승인 2017.04.27 18:42
  • 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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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통영출신 작곡가 윤이상 특집보도

▲ 작곡가 윤이상
유럽 곳곳 탄생 100주년 음악회 열려
아시아와 유럽음악 아버지 같은 존재


오늘날 클래식 음악계는 토시오 호소가와부터 진은숙까지, 서양 아방가르드 테크닉과 아시아 근원적 요소를 접목하는 작곡가들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이 오케스트라 작품 ‘예악’으로 독일 도나우싱겐 페스티벌에서 국제적인 데뷔를 했던 1966년의 사정은 달랐다. 생황의 음색을 관현악으로 표현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남한에서 태어난 윤이상은 1945년 그의 조국이 분단된 이래, 남한과 북한의 통일을 위해 활발히 움직였다. 그는 1957년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공부하기위해 서독으로 이주하였고 10년 후, 박정희 군사정보시설 중앙정보부에 간첩으로 간주되어 납치되어 수감되었다. 서독 외부무의 항의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같은 저명한 음악가들의 구명활동은 그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윤이상은 1969년 서독으로 돌아가서 서독시민으로 귀화했다.

북한과 남한 양쪽 모두 그를 민족작곡가로 칭하지만 윤이상이 살아있을 때 활동발판을 제공한 것은 북한이었다. 1990년대, 평양은 윤이상의 이름을 딴 페스티벌과 앙상블을 만들고 연구소를 세웠다. 윤이상은 1994년에 자신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되는 페스티벌에 방문하고자 했으나 당국과 불협화음으로 인해 고국의 땅을 밟는 것이 좌절됐다.

윤이상의 업적의 대부분이 잊히고 있지만,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콘서트는 유럽과 한국 전역에 걸쳐 열린다, 4월 20일 바르셀로나에서 노부스 콰르텟의 연주로 ‘현악 사중주 1번’이 스페인에서 초연이 되며, 6월 12일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 지휘 아래 브루크너 오케스트라 린츠와 매트 하이모비츠의 연주로 ‘첼로협주곡’이 오스트리아에서 초연된다.

한국에서는 2000년에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통영국제음악제가 3월 31일부터 4월 9일까지 열린다. 아르디티 콰르텟과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과 체롤로를 위한 영상’을 연주한 윤이상 솔로이스츠 베를린 등 유렵 연주단뿐만 아니라 통영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윤이상의 곡을 연주하였다. 또한 그의 오페라 ‘류퉁의 꿈’도 무대에 올랐다.

9월에 베를린 뮤직페스트에서 네 차례의 콘서트에서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호소가와와 리게티의 음악과 함께 윤이상의 곡 ‘예악과 무악’이 연주된다.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베를린은 윤이상의 ‘차원’을 노노, 쇤베르크, 베토벤의 음악과 함께 연주할 예정이다.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프랑크푸르트 라인-마인의 현대음악을 위한 비엔날레에서는 ‘Transit’이라는 주제 하에 2015년에 제작된 ‘윤이상-북한과 남한사이’ 다큐멘터리 상연을 시작으로 윤이상을 탐구할 예정이다.

삶에서나 작품 양면에서 윤이상은 유럽과 아시아 문화를 연결하였다. 그의 작품은 중국과 한국의 궁중음악을 서양 악기와 양식에 적용하였고 인도주의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첼로협주곡에는 본인이 1986년에 말했듯이 ‘삶과 죽음과 관련된’ 그의 수감생활 실체가 스며있다. 통일을 염원하며 작곡한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이중협주곡’은 목동(목가적 오보에)과 왕자(천상의 하프)가 은하수의 양끝으로 추방된 별로 묘사된 동화를 표현한다.

린츠의 데이비스는 전화통화에서 “윤이상은 그의 삶을 사람들을 연결시키는데 헌신했다”고 이야기했으며 “여기에는 북한과 남한의 화해뿐만 아니라 1910년부터 1945년간 한국을 점령했던 일본을 용서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음악은 이를 위한 그의 언어였다”고 말했다. 음악 학자이자 윤이상연구소 설림자인 발터-볼프강 슈파러에 따르면 서구 음악 교육 시스템은 윤이상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탐구하도록 촉진했다고 한다.

슈파러는 1970년대에 윤이상이 베토벤이 추구했던 “어둠에서 광명으로 향하는 극적 구도에 이르게 된다”고 평했다. 그러나 음과양 상징주의는 매우 중요했다.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이 항상 음양이 함께 하길 원했다고 했다.

1976년 첼로 협주곡은 첼리스트이기도 했던 작곡가의 생존을 위한투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조용하게 울리는 인상적인 목탁 소리는 그가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감옥에서 밤중에 들려왔던 불교 장례의식을 의미한다. 스며들 듯 사라지던 목탁 소리는 협주곡 끝에 다시 등장한다. 첼로가 죽음을 암시하듯 사라지고 난 후 바이올린과 두 트럼펫과 함께 마지막 말을 남긴다.

윤이상의 관현악 음악에서 엿보이는 소리의 층위는 리게티나 예나키스와 같은 유럽 동시대인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윤이상의 ‘주요음 기법’을 설명하며, “윤이상은 한 음을 중심으로 그 주변이 장식되도록 했다, 그 개별음이 복제되어 붓글씨처럼 흘러내린다”고 슈파러는 말했다.

슈파러는 또한 윤이상이 조국의 소리와 철할을 협주곡 형식으로 통합하려고 했을 때, 일부 음악학자들이 “오래된 와인을 새병에 담으려고 한다”라는 말로 윤이상을 비판했다고 했다. 윤이상의음악적 특생은 연주자들에게 엄청난 기술을 요구한다. 오늘날까지 그 어떤 주요 오케스트라도 그의 5개 교향곡을 녹음한 바 없다.

데이비스는 “오케스트라 연주는 철저한 리허설을 요구하지만 리허설 전부터 시간을 할애하여 연습하는 음악가를 필요로 한다”면서 “그 음악적 언어는 서양과는 전혀 다른 화성과 선율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청중들에게 그리 단순하지는 않았다”라고 했다.

“윤이상은 첼로 악보상의 모든 음계에 명확한 셈여림 기호를 표기했지만 연주자는 그 기호에 따라 연주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한국전통음악의공명과 선율 형을 생각하면서 연주해야 한다”고 이번 주 금요일, 토요일에 하이델베르크 스프링 페스티벌에서 윤이상의 작품을 연주할 예정인 독일계 한국인 첼로연주자 이상 앤더스가 말했다.

또 “윤이상은 그 음악적 언어를 우리가 이해하는 언어로 옮기기 위해 음열기법을 활용했다”라며 윤이상이 서독일에 도차한 후 익혔던 12음계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은숙(베를린 거주, 55)에게 있어 윤이상의 개인적 표현양식은 그녀가 전통적 한국음악을 접할 수 없었던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창조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취약한 현대적 레퍼토리 기반과 문화적 고정관념으로 인해 윤이상의 작품이 홀대 받는다고 지적하면서 그의 음악이 보다 폭넓게 수용되기를 기대했다.

“브루크너의 작품이 프랑스에서 공연되고 드뷔시가 독일에서 음악가적 지위를 확립하기까지 상당 기간이 걸렸다”고 서울에서 발송한 이메일에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데이비스는 윤이상을 19세기 자국의 지역적 표현방식을 클래식 형태로 격상시킨 서양 작곡가들에 비유하면서 “아시아와 유럽음악의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했다.

“오늘날 콘서트 생활은 완전히 국제적인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음악작품은 우리에게 지역색을 느끼게 하고 우리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데이비스가 덧붙였다. 백삼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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