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판사판(吏判事判)과 건달(乾達)
칼럼-이판사판(吏判事判)과 건달(乾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5.01 18:39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이판사판(吏判事判)과 건달(乾達)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 의미가 와전된 것이 적지 않다. 오래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 용어가 일상에서 통용되면서 전혀 뜻밖의 의미로 변한 것도 비슷한 예다. 현대 사회에서 ‘사바사바’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아첨하거나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을 꾸미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사바(娑婆)’는 본래 불교 용어로 산스크리트어에서 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가 사는 인간 세계, 즉 속세(俗世)를 뜻한다. 따라서 불경에서 ‘사바사바’라고 암송하면서 자신은 물론 듣는 사람들에게 이 땅의 중생은 온갖 번뇌를 인내해야 하고 성직자들은 속세의 피곤함을 참고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불교 용어인 ‘이판사판(吏判事判)’역시 현대 사회에서 의미와 뜻이 와전되었다. 이판사판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자포자기 심정, 또는 막다른 곳에 봉착한 현실에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 사생결단을 낸다는 의미로 쓴다. 하지만 이 말은 1970년대 후반까지 국어사전에도 실리지 않을 정도로 속어로 분류되었다. 이판과 사판은 불교에서 승려를 의미한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하권 〈이판사판사찰내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선 사찰에는 이판승과 사판승의 구별이 있다. 이판이란 참선하고 경전을 강론하고 수행하며 흥법포교하는 스님이다. 속칭 공부승(工夫僧)이라고도 한다. 사판은 생산에 종사하고 사찰의 업무를 꾸려나가고 사무행정을 해나가는 스님들이다. 속칭 산림승(山林 또는 産林僧)이라고도 한다. 이판과 사판은 어느 한쪽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상호 관계이다. 이판승이 없다면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이어질 수 없고, 사판승이 없으면 가람이 존속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현실 사회에서 왜곡된 것은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의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 억압정책 때문에 승려들이 천대를 받았다. 특히 후기에 들어서면서 승려들은 관가나 유생의 통제를 심하게 받았다. 이들의 요구에 따라 기름·종이·신발 등을 만들어 바쳐야 했고 잡역에도 동원되었다. 때문에 승려들은 참선이나 강경 등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고, 심지어 승려들이 사찰을 버리고 도망쳐서 문을 닫는 사찰까지 있었다. 그래서 사찰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승려 역할을 이판승과 사판승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이판승은 공부에 전념했고 사판승은 사찰을 관리하고 관가와 접촉해 난제를 협의하고 교단의 재원을 유지·증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스님이 되려면 이판승과 사판승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모든 인연을 끊고 불도에만 전념하는 이판승을 선택하면 절의 운영이 엉망이 되었고, 절의 운영에 신경을 쓰는 사판승을 선택하면 공부가 모자라 자질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이판승과 사판승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는 결코 쉽지 않았고, 이러한 심적 갈등에 빗대어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불교용어가 현실 사회에서 잘못 사용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앞서 지적한 대로 조선 시대에 들어와 불교가 탄압받으면서 위상이 하락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분위기는 불교를 왜곡하거나 해학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둘째, 불교 용어가 외부에서 들어오기도 했고 한자여서 일반인들이 해독하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셋째, 외부에서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기본 토속신앙이나 기복적 무속신앙 등이 일부 접목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한 예로 불교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서민들의 정서가 반영되어 본래 의미가 변질된 사례로는 ‘건달(乾達)’이 있다. 현실 사회에서 건달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노력해서 살아가려고 하지 않고 주색잡기와 같이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일에 매달려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건달의 본래 의미는 이와 전혀 다르다. 16세기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건달은 ‘간다르바’의 한자음 건달바(乾闥婆)에서 유래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받들고 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여덟 수호신인 팔부중(八部衆)이 있는데 건달바는 이 수호신 중 하나이다. 이 건달바가 시간이 흘러 시대가 바뀌면서 세속에서 할 일 없이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고 말았다.

내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기에 한 번 음미해 보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