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산(飛鳳山)
비봉산(飛鳳山)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1.26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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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 상봉동동 문화위원
비봉산은 해발 138m 면적 20.8ha 상봉동등 3개동에 걸쳐있으며 1968년 5월 27일 건설부고시 제 331호로 전 면적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진주읍치를 만들 때 비봉산을 진산으로 관청의 터전을 삼았고 한양같이 동쪽에 있는 종묘인 향교는 조선 명종13년(1558)에 상봉동 비봉곡으로 이전 34년간 있던중 선조25년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소실, 현 옥봉동으로 이건 중건하였다. 남쪽 산성인 진주성에 성황사인 창렬사(彰烈祠)는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열히 순국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모두 목숨을 아까워 하지않고 나라를 위해 장렬히 싸우다 순국한 관군민들로서 이름이 천추에 빛나고 있다. 매년 3월 첫정일(丁日)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서쪽 사직단(社稷壇)은 곡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토지신과 곡물신에 제사를 지내는 소룡골에 제단을 만들어 고을의 성주가 제주가 되어 정월에 사직단에 나아가 고장의 평안과 풍년을 빌었다. 북쪽의 의곡사(義谷寺)위에 여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줄 자식이 없어 제사를 받지못한 원귀(寃鬼)를 모신곳이다. 비봉산의 얽힌 전설로 진주강씨 집안에는 출중한 인물이 많이 배출하여 대봉산(大鳳山)밑에 웅거하면서 권세를 부렸으니 장래 국가가 위태롭다는 추정에 의하여 대봉산을 비봉산으로 서봉지를 가마못으로 개명하였다. 대봉산 서편에 봉황이 놀 수 있는 장소로 서봉지와 오죽전(梧竹田)을 만들어 주었다.

비봉산밑 비봉루는 공민왕때의 학자이고 정치가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장구지소(지팡이와 미투리가 머물던곳이나 스쳐간 곳)로 영남을 안렴(按廉)하실적에 당시는 봉명루에서 시를 지어 전하고 있다. “비봉산전 비봉루(飛鳳山前 飛鳳樓) 비봉산 앞 비봉루에/ 루중숙객 몽유유(樓中宿客 夢悠悠) 잠든객의 꿈길이 한가하네/ 지령인걸 강하정(地靈人傑 姜河鄭) 지령의 인걸은 강하정이요/ 명여장강 만고류(名與長江 萬古流) 그 이름 긴강과 함께 만고에 흐르리라”/ 이 시를 비봉루의 주련시로 은초정명수 선생이 쓰서 기둥에 걸어 놓았고 포은정몽주 선생 “장구지소”의 글귀를 비석에 새겨 담장밑에 세워놓았다. 당시 봉명루는 객사와 옆건물로 지금의 롯데인벤스 아파트단지로 보고 있다. 이 자리는 고려때부터 객사로 내려오다 일제때는 우리문화말살정책을 펴면서 헐고 붉은 벽돌집으로 단장된 재판소 건물을 조선건국이후부터 검찰청과 법원 MBC 방송국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17세기경 진주성로에 비봉산밑에 관청이 운집하고 있었는데 동헌의관아, 객사, 봉명루, 사마소, 질청등 관청이 군집해 있었으며 현재는 교육기관인 학교 많은 사찰 비봉산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

이외 비봉산 산신제 삼선암에 있는 고려동종 임진왜란때 승병을 길러낸 의곡사 조국과 민족을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한 훌륭한 애국지사 장두관투사의 묘 독립지사 박달준의 아들도 이곳에 살고 있다. 진주강씨의 시조사당인 봉산사가 있고 진양정씨 선현의 위패를 모신 세덕사와 같은 유적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 바로 비봉산을 중심으로 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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