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강감찬 귀주대첩 999주년
진주성-강감찬 귀주대첩 999주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6.07 18:39
  • 14면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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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시인-강감찬 귀주대첩 999주년


인헌공(仁憲公)강감찬(姜邯贊)장군께서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큰 공을 세운지 999주년이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3대첩이라 하고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권율장군의 행주대첩도 큰 공적에 해당된다.

강씨는 동양에서 가장 먼저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고려 삼한벽상공신 강궁진(姜弓珍)의 자손이라고 전해 온다.

강감찬(948~1031)장군은 서울 봉천동(그 당시 시흥군)에서 태어나 묘소가 충북 청원군(청주)옥산면에 있어 직계 손들이 주로 서울. 경기도. 충청도에 거주한다고 말한다.

고려가 친송정책을 실시하고 현종이 거란으로 입조를 요구한 일에 대하여 거부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구를 실시하지 않게 되자 소배압이 약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 왔다.

강감찬 장군은 서기 1011년 국자제주(국립대학 총장)에 제수되고 1016년 이부상서에 오르고 1018년에 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平章事)에 제수됐다.

상원수 대장군 강감찬 장군은 20만 대군으로 소배압을 제압하게 되는데 강민첨 장군으로 하여금 1만 명의 군병으로 자산군에서 적을 격파하게 하고 김종현 장군으로 하여금 1만 명의 군병으로 개경을 방어토록 작전을 세웠다.

침략군 거란군병이 식량이 떨어지자 환국할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침 비바람이 남에서 북으로 불자 강감찬 장군이 맹렬히 공격해 추격전을 전개해 살아서 돌아간 자 불과 수천 명에 불과했다.

강감찬 장군이 귀주와 홍화진 대첩을 귀주대첩이라 하고 그 당시 강감찬 장군의 춘추 71세였다.

강감찬 장군은 36세 때 문과에 급제해 문무를 겸전한 분이었으나 <고려사>에 보면 그의 용모에 대하여 체격이 작고 용모가 보잘 것 없었다고 기록했다.

강감찬 장군의 제안에 따라 전라도로 몽진했던 현종은 전쟁이 끝난 다음 장군을 평양의 서경유수에 제수하고 이어 이부상서로 임명했으나 이후 10년간 야인으로 생활했는데 식자들은 기발한 안전장치였다고 말한다.

죽기 1년 전 1030년에 문하시중(영의정에 해당)에 제수되기도 했다. 2018년은 강감찬 장군이 10만 대군을 귀주와 홍화진에서 대첩을 거둔지 999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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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 2017-06-08 10:05:23
강감찬 장군의 위대한 공적은 영원하리라 말안해도 잘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