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진주의 상징과 그 맥(脈) (Ⅱ)
칼럼-진주의 상징과 그 맥(脈) (Ⅱ)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6.13 18:2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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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진주의 상징과 그 맥(脈) (Ⅱ)


지난주에는 고려시대 진주출신의 충절인(忠節人) 시랑공(侍郞公) 하공진 장군의 만고불후(萬古不朽)의 충절사연을 기술했다. 향후 지속적으로 진주출신 충절인들의 그 맥과 정신을 정통샤료에 의거하여 개진하겠다.

우선 역대 진주인물들에 대한 타지역인들의 객관적인 평가에 의하면, 진주는 과거 천여년동안 “국지인재지부고(國之人材之府庫) 즉 진주는 온나라에 인재를 공급하는 창고”로 불릴만큼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곳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정조때 대사간을 지낸 윤행임(尹行恁)은 전국 각지역민의 성향을 사자성어로 풀이하면서 진주인을 일러 “태산교악, 설중고송(泰山喬嶽, 雪中孤松)” 즉 진주인은 모든 산악의 모습을 능히 바꾸고, 매서운 눈보라를 홀로 견딘다”라고 하면서 진주인은 말없이 강직하게 절개를 실천하는 소나무에 비유하기도 했다.

한편 영조때의 실학자 이익(李瀷)선생께서는 진주인은 대체로 “낙선호의(樂善好義) 즉 착한일을 즐겨하고, 정의로운 일을 좋아한다”라고 기술했으니, 우리 진주인에 대한 타지역에서의 객관적인 평가들이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사료된다.

오늘은 지난주 하공진 장군에 대한 충절사연에 이어, 역시 같은 고려조의 현종때 거란의 10만 대군이 쳐들어오자 흥화진(興化鎭)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계속 개경으로 쳐들어오는 적들을 추격하여 대파함으로써 나라에 충성을 다한 은렬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 장군이 있고, 고려말에 경남 내륙에 까지 왜구의 침략이 수십차례 있었는데, 한때는 진주 촉석루가 불타고 진주인 거의 모두가 강성현 산성(지금의 산청군 단성면)으로 피난했던 매우 어려운때에 당시 진주목사 이빈(李賓)이 난폭한 왜군들을 일거에 격멸하다 순절하기도 했다.

다음 조선조 태종, 세종때 병마절도사 와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써 15년 동안이나 황량한 변방지역만을 개척하고 지키면서 태종과 세종께 충성을 다한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 장군역시 진주출신의 충절인 이었다.

또 조선조 문종으로부터 김종서, 황보인과 함께 어린세자 단종의 보호를 부탁받은 이유로,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때 수양대군에 의해 사사(賜死) 당한 단종의 충절신 충장공(忠壯公) 정분(鄭苯), 그분역시 우리고장 출신이다.

이어서, 세조 2년에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거열형(車裂刑)에 쳐해져, 만고의 충신들인 사욕신 중 한분으로 추앙되고 있는 충렬공 하위지(河緯地)가 있기도 하다.

또 조선조 선조 25년, 임진왜란때에 불과 3800명의 군사로 3만명의 왜구를 격멸시켜 명실공히 청사에 빛나는 진주성 대첩을 이루었던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순절이 있었다. 다음 1년 뒤인 계사년 (1593년) 전투에서는 10만명의 왜구에 의해 7만의 진주지역 민, 관, 군 모두가 순절(殉節)했던 계사순의 (癸巳殉義) 라는 세계 전사상 보기드문 충절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나약한 여성의 몸으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청사에 길이 빛나는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핏빛충절이 오늘도 남강따라 유유히 흐르고 있다. 다음호에서도 계속해서 진주 충절인에 대해서 기술하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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