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진주의 충절(忠節)과 그 맥(脈) (Ⅰ)
칼럼- 진주의 충절(忠節)과 그 맥(脈) (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6.18 18:0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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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 교수·진주문화원 향토문화 연구소장·강신웅 향토인문학 아카데미 원장

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 교수·진주문화원 향토문화 연구소장·강신웅 향토인문학 아카데미 원장- 진주의 충절(忠節)과 그 맥(脈) (Ⅰ)


지금까지 충절의 고장, 우리 진주를 크게 선양(宣揚) 했던 고려시대의 하공진 장군, 강민첨 장군, 이빈 진주목사와 그리고 조선조의 양정공 하경복 장군, 충장공 정분, 충열공 하위지 그리고 진주대첩의 대업을 이룬 충무공 김시민 목사와 세계 전사상 그예를 찾기 어려운 계사년 진주 7만인의 순절과 의기 논개의 최초 여성충절에 대해 살펴보았다.

오늘 본고에서는 “옛부터 남진주, 북평양”라는 말이 오랫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명성을 높였던 진주기생들의 충절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따르면 논개를 비롯한 승이교, 한금화 등 수많은 진주기생들은 다른 지방의 기생들과는 달리 일찍부터 기생조합과 교방이라는 특수한 기구를 조직하여 그들 힘을 크게 확장하여 끝내 목숨을 건 애국·애족을 위한 공식적 실천행동인 독립만세를 수차례 부르기도 했다.

이들 기생들 중 애국의 충절을 직접 몸으로 실천했던 진주기생 산홍(山紅)이 있었다. 현재 촉석루 옆의 논개 사당인 의기사 좌측 시판(詩板)에 당시 일제강점기하의 진주의 아픔과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인 다음과 같은 산홍의 시문이 있다.

千秋汾晉義(역사의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雙廟又高樓(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이 있네)
羞生無事日(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서)
笳鼓汗漫遊(피리불고, 북치며 한가로이 놀고만 있네)

이 시를 지은 산홍은 당대를 풍미했던 절세의 유명 기생이었다. 그는 당시 (1905~1910)나라를 팔아먹은 댓가로 얻은 내무대신이라는 막강한 관직과 권력으로 진주기생 산홍을 강제로 그의 첩으로 삼으로 했던 매국노 이지용(李址鎔)의 요구에 대해서 “世以大鑑爲五賊之魁, 妾雖賤倡, 自在人也, 何故爲逆賊之妾乎”(세상에서 대감을 을사오적의 괴수라고 하는데, 비록 저는 천한 기생년이지만 나도 내나름대로 사람구실 하고 있는데, 어찌 당신 같은 역적의 첩이 될수 있습니까?) 라고 하자 매국노 이지용은 크게 노하여 산홍을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폭행했다고 되어 있다. (황현의 《梅泉野錄》).

이와 같은 진주기생 산홍의 충절행위에 대해 후대의 시인 양회갑(梁會甲) 이라는 분은 “妓山紅, 數罪賣國, 賊不許寢, 自死,(기녀 산홍이, 매국노의 죄를 일일이 나무라며, 잠자리를 거절하고, 스스로 죽었다)” 라는 시를 지어 산홍의 용기 있는 충절을 극찬했다. 결국 산홍의 이러한 충절 행동은 진주 기생의 기개를 만천하에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진주인의 또 하나의 여성충절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사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상기와 같은 산홍의 이야기는 국민적 화제가 되어 1940년 이후 아직까지도 “歲歲年年” 이라는 노래가 만인의 애창유행가로 불리어지고 있다.

지금도 촉석루에 오르면 어디에선가 여인의 옷자락 소리 같은 부드러운 바람결에 “산홍아 너만 가고 나만 혼자 버리기냐” 하는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음호에서도 진주인의 충절에 대해서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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