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나의 6·25 회상기
칼럼-나의 6·25 회상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6.19 18:33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나의 6·25 회상기


아버지께서는 우리집안의 외동아들이었는데 내가 어머니배속에 있을 때 태평양 전쟁에 징발되어 일본으로 끌려가던 중 부산 부두에서 신체검사를 하다가 무릎에 이상이 있다는 검사관의 판단착오로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되돌아 오셨다고 들었다. 돌아오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내가 태어났는데 아들이었다. 집안에서는 겹경사라고 좋아들 하셨단다.

내가 여섯 살 되던 해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폭풍’이라는 공격명령과 함께 선전포고 없이 38도선 전역에서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T-40 소련제 탱크 242대, 전투기 170여 대, 비행기 200여 대 병력 20만 이상이었는데 국군은 탱크와 전투기는 전무했고 단지 20여 대의 훈련용 연습기와 연락기가 전부였다. 그런데 국군은 1950년 6월 24일 자정을 기해 그동안 유지하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면서 농촌 모내기를 도우라고 사병들에게 2주간 특별 휴가를 주었고, 주말이 겹쳐 부대 병력 거의 절반이 외출한 상태였다.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이하 국군의 고위간부들은 저녁 6시에 시작한 육국회관 낙성식 파티로 술에 취해 전쟁 당일인 일요일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었다가 비상벨에 잠을 깼을 정도였다.

미국은 2일 후인 6월 27일 유엔안보리를 열어 ‘북한군은 즉각적인 전투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 채택으로 63개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6월 29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목표 폭격 권한을 부여했다. 불과 1개월 만에 낙동강까지 밀린 전쟁은 게임이 되지 않는 전쟁이었다.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 남쪽의 북한군을 격멸하고 전쟁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여 북진을 계속하여 통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 했다. 중국에서는 10월 1일 마오쩌둥이 김일성이 보낸 지원 요청 전문을 전달받고 ‘인민지원군’의 출병 명령을 하달하여 30만 명이 투입되었는데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나는 전쟁 중에 들어왔던 중공군이 우리 동네에도 왔었다. 지금기억하면 그네들은 나이도 어리고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남쪽으로 내려 갈 때는 개미떼처럼 많았는데 다시 북쪽으로 후퇴할 때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인해전술 투입병력이었다. 남쪽의 총알 숫자보다 인민군 숫자가 더 많으면 이긴다는 전략전술이었었다. 나는 이런 전쟁이 최고조로 달했던 1952년 3월 3일 전쟁발발 618일차 되는 날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때는 교실이 모라자라서 학교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 밑에서 수업을 하곤 하다가 비행기 소리가 나면 나무 밑에 숨곤했다. 전쟁 중이라 우리 동네에서는 낯에는 방공호를 파고 저녁이 되면 일찍 불을 끄고 숨죽이면서 하룻밤을 지내곤 했다. 불빛이 비치면 비행기가 폭격을 한다고 해서 전기는 없었지만 집집마다 불씨 자체를 없애곤 했다. 난리 통에는 흉측한 소문이 나돌았다. 인민군이 들어오면 경찰과 군인은 가족까지 처단하며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하여 일을 많이 하지 않아 부드러운 손을 가려내어 처단한다는 소문에 공포에 떨기도 했지만 우리 동네는 손이 부드러운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농사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지금생각해 보니 노동자들은 살려주고 지배계급들은 죽인다는 의미였다. 즉 손이 부드러운 자들은 착취계급이라는 의미였다.

3년간의 격전 끝에 어느 측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자 전쟁을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막후 접촉으로 휴전협상의 장을 열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1950.6.25.∼1953.7.27. 1129일 3년간의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컸다. 국군 62만, 유엔군 16만, 북한군 93만, 중공군 100만, 민간인 250만, 이재민 370만, 전쟁미망인 30만, 전쟁고아 10만, 이산가족 1,000만 등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을 넘는 1900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휴전선은 2017년 현재 64년째 같은 민족끼리 세계에서 유일하게 서로 총 뿌리를 겨누면서 지속되고 있다.

남쪽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현재 제19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2명의 지도자가 이끈 반면, 북한은 김일성 주석과 아들 김정일을 거쳐 손자 김정은의 3명에 이르고 있다. 남쪽은 전쟁의 폐허와 절망의 끝자락에서 다시 일어선 위대한 역사의 승리국가가 되었다. 25일이 전쟁발발 67주년이 되는 날 이기에 한 번 되새겨 보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