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아이콘 3.18을 기억한다
진주아이콘 3.18을 기억한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1.3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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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래/공연 연출가
기미년 고종황제의 국장일을 계기로 거족적인 민족운동은 방방곡곡에서 일어났고 진주는 마침내 1919년 3월 18일 진주장날에 맞춰 대한독립만세 의거가 일어났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직접 목도하고 감화·감동을 받았던 김재화, 정용길, 심두섭, 조응래, 박대업은 고종황제 인산참례를 마치고 일제의 삼엄한 경계와 검문을 피해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휴대하고 진주에 돌아왔다. 3월 초순경부터 독립만세운동을 촉구하는 격문들이 진주거리에 나붙기 시작했고 김재화, 박진환, 강달영, 정준교, 심두섭, 강용근, 이강우, 강상호 등 중추적 인물들에 의하여 극비리에 추진돼 3월 18일을 독립만세일로 결정했다. 이날을 시작으로 5월까지 크고 작은 20여회 시위에는 삼만여명의 군중이 동원되었으며 18일부터 연이어 4일간에 걸친 독립만세 의거는 도청소재지인 진주를 중심으로 사천, 삼천포, 산청, 단성, 하동, 남해가 하나로 뭉쳐 단결하고 연대했다는 점에서 진주의 3.1독립만세운동이라기 보다는 서부경남을 대표하는 진주정신의 발현이었다. 경성의 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조직적인 만세시위였고 진주의 독립만세 시위는 결코 경성으로부터 천리 먼 곳 변방의 목소리가 아니라 개혁의지와 저항의식이 국난극복의 의지로 나타난 거족적인 민족운동인 3.1독립운동의 중심축을 이룬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8일 첫째 날에는 3개대로 나눠 제1대는 옥봉동부근, 제2대는 진주재판소(현,롯데인벤스)부근, 제3대는 진주장터에서 군중을 모았고 각각 장소에서 이강우, 정용길, 강달영, 정준교 등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저께 밤에 정용길(당시,진주경찰서 순사부장)의 집에서 만든 태극기와 박진환, 전준교가 천전리 망경대에서 등사한 삼천여장의 선전문으로 군중들은 독립만세 외침에 동참했다. 둘째 날에는 남녀노소, 장꾼, 노동자들이 함께 시위를 전개했고 걸인들도 한곳에 모여서 시위했으며 또한 기생독립단이라는 이름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할 때 처음으로 큰북, 작은북, 나팔 등으로 악대원이 동원되었다. 셋째 날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군중들이 약속한 듯 모이기 시작해 대오를 갖추고 다시 악대를 선두로 독립만세 시위대열은 경찰서로 몰려가 시위로 체포된 양민출감을 요구했다. 넷째 날인 21일에는 강민호, 김경택 외에 수명의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계획하다 탄로나 검거되었는데 이에 격분한 학부모들이 독립만세 시위에 합세함으로서 진주의 대한독립만세 외침은 수천명을 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진주의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전국적인 만세시위의 시류에 따라 갑자기 일어났다고 볼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진주는 조선후기 봉건체제의 모순에 저항하여 농민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기위한 임술년 농민항쟁이 일어났던 곳이고,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난 진주동학군이 이끈 일본군과의 전투는 어느 곳보다도 치열했던 지역이었다. 이런 연유로 진주는 배일의식이 강하고 1896년 노응규를 중심으로한 의병항쟁은 진주정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임진년 새해가 시작됐다. 새 달력을 들추다보면 다이어리에는 24절기와 함께 많은 기념일이 있는데 진주와 연관된 기념일을 추가해본다. 진양군과 통합된 1995년 1월 1일,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한 4월 1일, 진주성이 함락된 6월 29일, 개천예술제가 창제된 10월 3일, 진주대첩을 기념하는 10월 10일 시민의 날, 5월 15일 국외문화재 환수를 위한 진주선언 채택일 등을 기억하는데 앞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처음 외쳤던 3월 18일을 진주아이콘으로 기억하자. 진주문화사랑모임(리영달)이 이날을 기념해서 걸인독립단과 기생독립단을 특화한 햇불행진을 통해 당시의 독립만세 외침을 재현하고 있으며 올해는 진주시민대표들이 3.18기념일에 맞춰서 약탈된 국보급 문화재인 진주 연지사종 환수요구서를 일본에 전달하는 새 역사를 쓴다.

1919년 3월 18일 11시경에 옥봉동 진주교회의 종이 갑자기 사라져 비봉산 나팔소리를 만세외침의 신호음으로 대신했다는 주장과 해방 후에 처음 발간한 ‘경남도지, 1959년’의 기록대로 진주교회 종소리가 독립만세 첫 외침의 시작을 알린 신호인지 명확히 밝혀내자. 그리하여 기념일로서 진주아이콘 3.18을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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