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진주의 충절과 그 맥(脈) (Ⅱ)
칼럼-진주의 충절과 그 맥(脈) (Ⅱ)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7.09 18:1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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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 교수·진주문화원 향토문화 연구소장·강신웅 향토인문학 아카데미 원장

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 교수·진주문화원 향토문화 연구소장·강신웅 향토인문학 아카데미 원장-진주의 충절과 그 맥(脈) (Ⅱ)


지난호 까지는 조선중기의 진주선열들의 충절 내용을 살펴보았다.

본고부터는 한말 일제강점기의 진주지역 여러 선열들의 훌륭한 충절실천과 그 과정을 기술해보고자 한다.
우선 1870년대 이후 우리 지역의 의병 투쟁에 따른 충절의 역사를 본다면, 한말 전국적인 의병투쟁의 목적은 존왕양이(尊王攘夷: 본국 왕을 숭배하고 오랑캐를 배척한다)와 국수보복(國讐報復: 나라의 원수에 대해서 철저히 복수한다)으로써 이 목적을 위한 활동이 진주지역에서도 은밀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우리 진주에서는 노응규(盧應奎)가 1896년부터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민비시해(閔妃弑害)와 단발령(斷髮令)에 강하게 항거함으로써 서부경남의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충의정신과 1919년의 3.1 운동 때 9회에 걸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진주기생들까지 참여한 진주시민들의 충의와 애국정신이 오늘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을미왜변(乙未倭變)과 단발령을 계기로 노응규는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드디어 1896년 1월 8일에 서재기, 정도현, 박준필, 최두원, 최두연, 임기홍 등과 함께 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쉽게 노응규가 진주성을 점령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보다도 진주인들의 민중의식 고조와 당시 진주 본토박이었던 정한용이 진주민중을 사전에 규합하고, 진주향교의 장의였던 한진완 등의 충정어린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주성을 점령한 노응규 의병부대는 단성, 고성, 하동, 함안 등을 거쳐 부산까지 점령하려고 대부대를 움직여 김해까지 갔으나, 수뇌부의 의견충돌로 부산점령은 포기하고 결국 진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시 서울에서 파견된 이겸재는 서울진위대 병사 500명과 대구진위대 200명을 이끌고 진주성을 점령하니, 약 3개월에 걸쳐 활동했던 노응규가 이끈 소위 진주의 의병투쟁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결과 노응규의 의병투쟁이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이유가 무엇이던 당시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을 공식적으로 전개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우리지역 출신인 노응규의 조직적이고 기습적인 의병투쟁에서 나타난 그의 충절정신은 진주 천년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이어서 진주지역의 3·1운동 상황을 살펴보면 그 당시 진주에서는 1919년 3월 10일경부터 거리에 “삼남지방에는 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라는 격문이 여러 곳에 붙기 시작하면서 의거를 촉구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미 김재화, 강달영, 정준교, 심두섭, 이강우 등의 의혈(義血) 중추인물들은 의거를 극비리에 계획하고 있었다. 특히 진주는 일찍부터 일본은 물론 외부세력에 대한 저항의식이 매우 강한 지역이기에 진주의 3·1 의거는 당연한 결과였다.

진주 3·1 의거의 특색은 진주는 다른 지역의 의거와는 달리 의거에 참여한 사람들의 신분을 초월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최하층민으로부터 최고 상류층은 물론, 각급 학교의 어린학생들, 기생 그리고 걸인까지도 참여함으로써, 고려 초부터 나타난 진주인의 인권평등정신과 애국, 애향정신인 소위 거룩한 진주정신을 널리 선양하게 되었다.

오늘처럼 소슬비 내리는 날에 남강변을 거닐면 어디선가 그 옛날 진주 충절 선열들의 함성이, 오늘은 왠지 슬픈 울음으로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다음호에서도 진주 충절의 사연을 계속 기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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