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예술에 관한 단상
문화와 예술에 관한 단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2.0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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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순/경성대 무용학과 외래교수
문화와 예술 이 두 거대한 흐름 그 앞에서 우리들은 ‘그것은 무엇이며 혹은 어떠한 것이다’라는 언어의 틀로 감히 개념 짓고 환원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이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기존의 수 없이 많은 문화 그리고 예술에 관한 정의들을 섣부른 판단들이라 단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정의들이 관계하는 방식을 문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이 짧은 글의 목적이라고 감히 말하고자 한다. 문화와 예술이 무한한 지속 중에서 변화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리의 몸이 분리되어 지금껏 박제되어 있는 정의들, 지금 해석되고 있는 정의들, 앞으로해석될 해석들: 정의의 일시성과 결정불가능성 정의 될 때 ‘(사회적) 주류’라는 흐름과 관계 맺는 방식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탈근대 이래 시도되는 ‘정의의 불가능성’의 타당성에는 아랑곳없이 수많은 정의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음을 상정하는 듯 하고, 또한 다양성이라는 ‘포괄적’ 행위를 지향하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유효하게 간주되는 변증법적 구분 즉, 문화와 예술을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지음으로써 ‘정의의 불가능성’ 그리고 ‘다양성’을 실천으로서가 아닌 하나의 주개념, 주 해석을 위한 아이디어들의 생산과정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문화, 예술, 그리고 우리의 몸을 탈근대 이전의 시기로 되돌려 놓는다. 또한 개념으로의 환원은 언어 너머의 세상을 언어로 가두어야만 하는 행위의 속성을 지닌 탓에 결국 자기의 모순(탈근대적 사유가 근대적 사유로 되돌아가는 것)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자처한다. 따라서 문화, 예술 그리고 우리의 몸은 그것들이 정의라는 ‘틀’ 특히 ‘(사회적)주류’ 혹은 ‘비주류’로 가두어지지 않을 때라야 만이 비로소 세상에서 유령처럼 우리의 삶과 함께 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가시적 형태로서 지금 이 순간에 위치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들과 공간이 만나는 하나의 지점에서 발생되는 하나의 비가시적 다양성을 잉태한 가시적 생사(生死)의 공간이다.

생사의 공간인 우리의 몸은 무한대의 시공을 통해 무한대의 다양성과 접촉하기와 단절하기를 반복한다. 그러한 접촉과 단절의 반복을 통해 탄생하고 죽어가는 것이 문화와 예술이다. 문화와 예술 그리고 우리의 몸은 불가분의 관계 속에 생사를 반복하는 ‘무한대’이다.

우리는 도처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문화와 예술들을 만난다. 때로는 문화와 예술들을 생산과 소비의 차원으로 가두고 경제적 유통 구조를 통하여 서열화 시켜 상품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사회현상 또한 심심찮게 경험한다. 이것은 인간의 주변은 인간의 변화와 더불어 구축될 수밖에 없는 부수적 차원들일 뿐이라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는 행보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인간은 ‘주변’이 있으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관계를 통해서라야만 그녀의 삶을 살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과 문화 그리고 예술은 관계를 통해 공존하며 함께 생사를 보낸다. 문화와 예술이 인간들을 위한 삶의 수단으로만 존재할 때, 특히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경제적 가치로서 서열 매겨 질 때 무한대로서의 문화와 예술은 포기되어야만 할 것이다. 무한대로 향하는 몸 또한 포기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에서 인간 삶의 수준 향상과 관련해 선택받았다고 소리 내는 문화와 예술들은 과거 장날 사고 팔리던 소와 같고, 어시장 경매에서 사고 팔리는 생선들과 같다. 이것은 자본주의 핵심 권력인 경제적 잣대가 만들어 낸 오늘날 문화와 예술의 모습일 것이다.

오늘날의 문화와 예술은 생사를 반복하던 중 살아있는 인간의 몸과 떨어져 오직 죽음으로 향하는 시공간에 내팽개쳐져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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