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진주천년의 뿌리-저항정신(抵抗精神, Resistant spirits)
칼럼-진주천년의 뿌리-저항정신(抵抗精神, Resistant spirits)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8.06 18:0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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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 교수·진주문화원 향토문화 연구소장·강신웅 향토인문학 아카데미 원장

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 교수·진주문화원 향토문화 연구소장·강신웅 향토인문학 아카데미 원장-진주천년의 뿌리-저항정신(抵抗精神, Resistant spirits)


지금까지 진주의 충절과 그 맥에 관해 선대문인들의 문집으로부터 비교적 자세히 살펴보았다.

본고에서는 진주인들의 전통적이고, 고유한 그들의 저항정신에 대해서 정통사서(正統史書)를 중심으로 기술해보고자 한다. 자고로 동·서양의 저항정신의 시원은 중국과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200년대 진의 멸망까지 이르게 했던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농민의 난이 있었고, 서양의 영국에서는 와트 타일러(Wat tyler)의 농민항쟁이 1381년도에 발발하여 영국전역에 대대적으로 확산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하층신분인 노비나 농민들의 저항 및 반란의 최초시작은 신라시대 헌덕왕 계열에 장기간 권좌에서 밀렸던 무열왕 계열에 속했던 김헌창(金憲昌 816년 진주도독역임)의 권좌 탈취를 위한 난이 있었지만 김헌창의 난은 하층신분이 갖는 상층자들에 대한 원래의 진주인의 저항정신 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보지만 여전히 우리 지역인들의 저항정신의 비조(鼻祖)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옛날 진주인 본연의 저항정신 형상의 개시는 이미 고려신종때 (1200년) 일어났던 일종의 하급관리 아전이었던 정방의(鄭方義) 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난은 원래 공사노비들의 주리(州吏)의 부패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비록 그 난리 기간은 일년 정도였으나 많은 사람들(약 6000명의 관리와 평민)이 참혹하게 희생되고, 당해 지역도 크게 황폐되기도 했던 충격적인 난리였다. 그보다는 이 정방의 난이 차후 전국적으로 발발했던 다른 농민 항쟁들에 자극제가 되면서 같은 해의 후반기에 지속적으로 일어났던 전국규모의 대민란이었던 임술민란의 원인이 되면서, 끝내 우리나라 민권운동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1894년대의 동학농민운동 발발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사실(史實)이다.

1200년대의 정방의 난을 이어 우리진주에서는 조선조 1862년 철종 때 당시 경상우도 병사였던 백낙신(白樂莘)의 탐학에 전직관리였던 유계춘, 이계열, 이명륜 등이 지방농민 8만명을 모아 그해 2월 6일 수곡 장날에 난을 일으킨 결과 수백명이 체포되고 수십명의 사람들이 처형당하고 유배되기에 이르렀던 소위 진주농민항쟁인 삼남의 큰 사건이 있었다.

상기와 같은 고려조 1200년 신종 때의 정방의 난과 조선 철종 때의 수곡중심의 농민항쟁 이후 진주지역에서 일어났던 저항정신의 산물로 계속해서 1909년 지역신문의 효시인 경남일보의 창건 그리고 1913년에 당시로서는 매우 미천했던 신분의 기생들이 진주기생조합의 설립과 동시에 진주기생들의 애국정신의 상징이었던 1919년 3월 19일의 진주기생들의 전국최초의 독립만세사건이 있었고 이어 1923년 전국 최초의 충격적인 저항정신의 정수(精髓)인 인권상승의 민권운동인 형평운동이 전국에서 최초로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상기의 진주지역의 농민의 난, 민중의 난, 그리고 형평운동들이 이곳 진주에서 다른 어떤 지역보다 먼저 발생했다는 사실과 그 이유에 대해서 차후 우리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보다 심도 있게 학술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우선은 이 지역민에게 이러한 저항정신이 뿌리 깊게 전승해온 직접적인 이유는 초기에 이 지역에서 발생했던 외침인 1592년의 임진왜란과 1593년의 계사순의(癸巳殉義)라고 볼 수 있다. 상기 두 사건에 의해 진주의 모든 산하는 초토화되고 심지어 진주에 있었던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 미물까지도 남강천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진 통환의 진주만이 안고 있는 아픔의 역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주인의 저항정신의 바탕에는 이 지역 출신으로 훌륭한 사상가이며 정치가인 남명의 경의사상과 삼우당, 문익점의 애국·애민 사상이 절절이 묻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때 이후 지금의 우리는 그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했던가? 하여 그분들의 위대한 시대정신과 저항정신으로 영원히 그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그들의 영령을 조금도 위로해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남강 물이 핏빛으로 흐르고 있음을 통감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뿐만아니라 진주성, 촉석루, 의암 그리고 망진산은 450년의 긴 세월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무언의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흐름의 몸짓으로 우리를 원망하고 있는 듯하다.

다음호에서는 상기 진주인의 상징적인 저항정신의 역사적사건인 고려조의 신종 때 진주민란과 조선조 철종 때의 진주농민항쟁과 그 후 일제강점기하의 형평운동에 대해서 남명조식과 삼우당 문익점 사상은 물론 작금의 우리지역 여러 축제와 관련해서 더욱 심도 있게 고찰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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