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과 공자
시경과 공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2.07 18: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신웅/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
지리산막걸리학교 교장
‘사기’의 ‘공자세가’에 “고석(古昔)에 시가 3000여 편이 있었으나 공자 때에 그가 중복된 것을 버리고 예(禮)와 의(義)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가리어 상대(上代)로는 후직 때의 것을 채집하고 중간으로는 은·주의 많은 시를 옮겨놓고 끝으로 여왕·유왕(B.C. 878~771) 때의 시가 없어질 때까지의 것에 이르기까지 305편을 모아놓았다”고 하였다. 이 주장이 만일 확실한 것이라면 금본 ‘시경’은 공자가 손수 선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 마치 서효목(徐孝穆)이 ‘옥대신영(玉臺新詠)’을 선집하고 왕개보(王介甫)가 ‘당백가시(唐百家詩)’를 선집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그러나 한·당대의 학자들이 이 주장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공영달(孔穎達)은 “‘서전(書傳)’에 인용된 시로서 ‘시경’에 보이는 것이 많고 없어진 것은 적다. 그렇다면 공자가 채록한 것이 전래된 시의 10분의 9를 버린 나머지라는 것과는 모순되므로 사마천의 이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나의 생각으로는 ‘논어’에 “‘시경’의 300여 편을 다 외우고 있다고 하여도 이에 정무를 맡길 때 일이 잘 되어가지 않고…”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공자 자신의 말이며 시편의 수를 말할 때마다 서슴없이 300이라고 한 것을 보면 공자가 본래 송습한 것은 300여 편뿐이지 더 많은 것 중에서 그가 스스로 취사하지 않았음이 명백한 것이다.

‘좌전’에 실려있는 오(吳)의 계찰(季札)이 노에 가서 주악의 연주를 본 것은 공자 이전의 일이고 그 때 가창된 국풍이 금본 ‘시경’의 15국풍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은 것은 더욱이나 300여 편이 공자가 산시(刪詩)한 것이 아니라는 명증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공자가 만일 산시한 것이라면 무엇을 기준으로 취사선택하였겠는가. 후인의 소위 ‘정절과 음탕’이 기준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음탕한 음악이라고 하는 정풍(鄭風)과 위풍(衛風)의 남녀애정을 표현한 작품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삭제되지 않은 일은 이상한 일이다. 또 ‘시경’에서 빠진 고대시가로서 다른 기록에 보이는 것, 가령 ‘논어’의, 아가위꽃 한들한들 / 너 그립지 않을까만 / 집이 멀어 어이하리(‘논어’의 ‘자한’) 라든지 ‘좌전’의, 비단실 삼실 있다해서 / 띠풀 그렁풀 버리지 마소 / 귀한 아씨 있다해서 / 천한 계집 버리지 마소 라든지 또는, 우리 임군 법도를 보소 / 옥과 같고 금과 같네 / 백성 힘을 길러주고 / 당신 호강 생각 없네 같은 시구들은 대체 이러한 시가의 어느 한 자 한 구절이 ‘예와 의’에 어긋나서 공자가 이를 시경에 넣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의 믿는 바로는 공자가 산시한 일이 절대로 없는 것이다. 금본 ‘시경’의 300편이 일찍이 의식적인 편찬을 거쳐서 된 것인지 아닌지는 깊이 알아낼 도리가 없다. 설령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편찬자는 사관(史官)이 아니면 태사(太師)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일 것이고 누구라고 꼭 꼬집어낼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요컨대 춘추시대의 사대부가 함께 즐겨 풍송한 시가가 이 300편인 것이며 비록 없어진 것이 있다고 하여도 백분의 1, 2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이는 이상의 여러 고사를 참고할 때에 대개 단언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시경’에 대하여 아무런 공로가 없다는 말인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큰 공로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논어’에 공자가 한 말로 “내가 위나라로부터 노(魯)로 돌아온 후에 비로소 음악이 바르게 되고 아(雅)(조정의 아악)와 송(頌)(종묘음악)이 각각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라는 ‘논어’의 ‘차한’편의 구절이 있고, ‘공자세가’에는 “‘시경’ 300편을 공자가 모두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하여 소(韶)와 무(武), 아와송의 음조에 맞도록 했다”고 하였으며, ‘장자’에는 “공자에게는 송영의 시가 300, 가창의 시가 300, 현악의 시가 300, 무용의 시각 300이 있다”고 하였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 이전의 시는 모두 음악에 맞추어질 수 없다고는 할 수 없었고 또 굳이 음악에 맞추려고 할 때에 악보를 문란하게 하는 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공자는 가장 음악을 즐기고 또 가장 음악을 잘 아는 분이었으므로 위에서 노로 돌아온 후에 악리(樂理)를 노의 태사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또 300편의 악보를 정리하여 없어진 것은 보충하고 틀린 것은 바로 잡았던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