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권태’론
아침을열며-‘권태’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8.30 18:1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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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권태’론


“인생이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유명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참으로 진리다. 그러나 언뜻 들으면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우뚱 할 수도 있다. 욕망이란 것은 프로이트나 라캉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워낙 유명한 주제니 누구나가 곧바로 수긍할 것이다.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 철저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온갖 ‘싶음’들이다.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다. 뭔가를 갖고 싶고,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 …. 나도 여기저기서 이 주제를 언급했었다. 그런데 ‘권태’란 것은 이 문장에서 무슨 의미인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모든 것이 시시하고 하찮게 되어버린, 무가치의 상태다. 이게 극에 달하고 보편화되면 저 니힐리즘에 이른다. 인간들은 이런 상태를 잘 견디지 못한다. 삶의 실상이 그러하다. 그런 권태가 우리의 욕망에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우리의 삶을 견인하는 것은 분명 욕망이다. 어린 시절은 장난감이나 인형 같은 것이 그 욕망의 대상이 된다. 돌이켜보라. 우리의 어린 시절, 우리는 얼마나 간절히 그런 것들을 원했던가. 그 욕망을 위해 부모님을 조르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했었다. 어른이 되면 이성이 그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이윽고 저 유명한 돈과 지위와 명예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 욕망을 채우려는 발버둥 혹은 안간힘 혹은 투쟁이 곧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얻게 된 이후 그 만족감, 성취감, 행복감이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되던가. 그것은 마치 나팔꽃처럼 활짝 피었다가 이내 시들어버린다. 그토록 간절했던 새집도 새차도 심지어는 사랑조차도 늘 똑같은 감흥을 주지 못하고 결국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곧바로 확인된다. 그래서 인간들은 또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욕망한다. 더 좋은 차, 더 큰 집, 더 많은 돈, 더 높은 자리, 심지어 더 멋진 이성. (그래서 사람들은 더러 사고를 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시 이루었다 해도 또 이내 시시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럼 또 새로운 무언가가 그 욕망의 대상이 된다. 욕망, 시시함, 욕망, 시시함, 욕망, 시시함 …. 그렇게 세월은 흘러간다. 그래서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은 것이다.

그의 이 말은 쉽게 거부하기 힘든 무게를 갖고 있다. 그러나 ‘아, 그런가요?’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면 거기까지다. 그래서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런 권태를 다스리는 철학. 그것을 통해 저 욕망을 다스리는 철학. 좀 바보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건 기회 있을 때마다 ‘원점으로 되돌아가보는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흔한 말이다. 하지만 흔한 말이라고 해서 그 철학적 가치가 덜한 것은 절대 아니다. 무언가가 처음 욕망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것은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던가. 그 시점에서 그것은 절대로 시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 빛을 다시금 떠올리고 되살려보는 것이다. 그런 것이 하나의 철학이 될 수 있다.

한때 그렇게 반짝이며 우리를 움직이던 많은 것이 있었다. 기술입국, 수출입국, 교육입국, 잘살아보세, 민주화 … 그 구호들은 우리의 가슴 벅찬 꿈이었다. 말하자면 국가의 욕망이었다. 우리는 그 중 많은 것을 성취했다. 그런데 지금 … 우리는 권태에 빠져 있다. 다 그렇고 그런 뻔한 것이 되고 말았다. 원점으로 한번 되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반드시 새로운 것만이 욕망의 대상이 되란 법은 없다. 오래된 골동품, 오래된 와인, 오래된 아내가 더욱 더 가치있음을 상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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