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이순신과 거북선
진주성-이순신과 거북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9.19 18:3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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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이순신과 거북선


이순신은 인종 원년(1545년 4월 28일)에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 4남중 3남으로 어머니의 꿈에 조부(참판공)가 나타나 “이 아이가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舜臣)으로 하라”고 이름(作名)을 지어 주셨다.

어려서 친우들과 병정놀이를 하면서 대장이 되어 친우들을 통솔하는 등 순신의 뒤를 따랐다. 만31세(선조 9년)식년 무과에 급제했다. 첫 발령지는 1576년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에서 근무했다. 어느 나라 역사에서나 전란은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국력을 다하여 방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나라는 지역적으로 강한 대륙의 변두리에 처해 있어 끊임없이 외세의 침입에 시달림을 받아 왔다. 특히 바다 건너 왜구의 침입 너무나 잔인스러운 것. 이럴 때 거국적인 대처는 뛰어난 무예와 열렬한 호국의 정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두나라의 통치문화도 달랐다.

일본은 무치(武治)의 나라고 조선은 문치(文治)의 나라였다. 일본은 통치자가 결정하면 국민은 무조건 전쟁에 뛰어드는 풍토인데 조선은 왜란전까지 일부 문신(文臣)중심으로 “민폐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전쟁준비에 반대하였고 두나라가 전쟁을 벌이면 조선이 밀리게 되어있다.

그러나 조선의 국운이 다하지 않았다. 남해 바닷가 조선 무장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이 버티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침공을 예견. 대책을 깊이 강구했다.

그가 최고 통치자의 시각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고민한 결과 나온 것이 신비주의 전략에 해당하는 신무기 거북선의 제작이었다. 해전에서 거북선이 맹렬히 활약. 일본 수군은 처음 보는 조선 수군의 새무기에 놀랐고 질렸고 위축됐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앞세워 임진왜란이라는 무시무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뛰어 들었다. 철갑선으로 거북모양의 선체에 뚜껑을 덮고 쇠송곳을 거꾸로 꽂아 적병이 오르지 못하게 하였고, 좌우에 각각 10개의 노가 있고 속력은 빨랐다. 선장실 장교실 등 24개의 방 무기고 휴게실로 선장1명, 장교16명, 병사259명 총277명이 승선했다. 1972년 1월 19일에 고성군 성내동에서 귀선 조감도가 발견되었다. 임진왜란때 옥포, 당포, 한산도, 부산, 명량, 노량 등 해전에서 적선을 크게 쳐부수어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대승리를 거둘수 있었음은 이 배의 맹활약에 힘 입은바 컸다.

‘지봉유설’에 귀선(龜船)에 관하여 이렇게 평하였다. “우리나라 전함은 규모가 크고 웅장하여 사람들이 말하되 왜선 수십척이 우리 전함 하나를 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1598년 11월 18일 남해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을 맞아 장렬한 최우를 마치니 그의 나이 54세였다. 순신은 충성심, 인격, 통솔력 등 위대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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