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세한도(歲寒圖)의 가르침, ‘변하지 않는 의리’
세상사는 이야기-세한도(歲寒圖)의 가르침, ‘변하지 않는 의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10.09 18:2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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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남용/거창경찰서 수사지원팀장 경위

문남용/거창경찰서 수사지원팀장 경위-세한도(歲寒圖)의 가르침, ‘변하지 않는 의리’


창 밖에 보이는 하늘이 파랗다. 이웃집 담벼락 밑에 서 있는 하얀 소국(小菊)에서 진한 향기가 느껴진다. 다함께 손을 잡고 벽을 넘어가는 담쟁이 넝쿨도 예쁘다.

추석 연휴 동안 먹은 풍족한 음식에 비해 가난한 운동량 탓에 몸이 무겁다. 글이 잘 써지지 않고,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단순·명료하게 정리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럴 때마다 필자가 의식처럼 하는 행동이 하나 있다. 혼자 걷기다.

길가에 피어 있는 꽃에서 얻은 글감과 바람이 전해준 아이디어가 작은 성공의 시작이었다. 걷다보면 스트레스와 쓸데없는 걱정의 찌꺼기가 어느새 땀과 함께 몸 밖으로 사라졌다.

영국의 작가 찰스 디킨즈는 “걸어서 행복해져라, 걸어서 건강해져라, 우리의 나날들을 연장시키는 오래 사는 최선의 방법은 끊임없이, 그리고 목적을 갖고 걷는 것이다”라고 했다.

집에서 거열산성 하부 약수터까지 약 3킬로미터를 갔다 올 생각으로 작은 물병 하나를 들고 나왔다. 거창읍을 가로지르는 영호강변을 따라 20분쯤 올라갔더니 온몸이 땀에 젖었다. 물을 마시며, 잠시 쉬었다 갈 요량으로 벤치에 앉았다.

진귀한 모양의 수십 그루의 소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농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필자의 마음속 깊이 전시되어 있던 옛 그림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 1844년, 국보 제180호, 가로 23cm, 세로 69,2cm)’다.

김정희는 실학자이자 서예가로서 창암 이삼만, 눌인 조광진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명필로 꼽힌다. 70년 동안 벼루 10개를 구멍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한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추사체’를 완성했다.
세한도는, 세력다툼에서 밀린 김정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혹독한 시련을 참고 견디며 그의 나이 59세(유배생활 5년)에 그린 문인화의 걸작이다.

추운 겨울날, 소박한 초가집 한 채 사이에 오른쪽에는 늙은 소나무와 잣나무 한그루, 왼쪽 편에는 잣나무 두 그루를 붓으로 그린 단순하고 쓸쓸함이 묻어나는 그림이다.

그러나 그림 속에는 스승과 제자의 변하지 않는 지조 높은 선비 정신이 숨어 있다.

역관(譯官) 이상적은, 권력에서 멀어져 초라한 신세의 스승을 외면하지 않고 1844년 중국에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등 귀한 책들을 구해다 주었다.

그림의 발문(跋文)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공자의 〈논어〉를 인용하여 이상적의 ‘변하지 않는 의리’를 표현했다.

또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도 성글어진다’고 했던 사마천의 말을 빗대어 세태를 비판하면서 제자의 높은 인품을 칭송했다.

스승의 선물에 감격한 이상적은, 청나라 학자 16명의 찬시(讚詩)를 받아 그림에다가 붙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세한도가 두루마리 형태가 된 이유다. 눈앞에 보이는 권력과 이득을 쫒아 생각과 행동이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사람이 있다.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고, 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고향 선배와 저녁식사를 했다.

“우리가 알고 지낸지가, 15년이 넘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서 좋아요”

잘해준 것도 없고, 오히려 폐만 끼친 것 같은 내게 선배의 말은 의외였다.

형편이 좋을 때는 몰랐는데, 그 반대가 되자 무시당하고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했단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가볍게 처신했던 순간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인생길을 걷다보면, 현실에 좌절하거나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런 사람에게 진심이 담긴 ‘위로’와 ‘용기’의 따뜻한 손을 먼저 내밀어 보자.

작은 손 하나가 담쟁이 넝쿨이 되어 고난의 벽을 넘어가는 가장 강한 힘이 될 것이다.

찬 서리 내려도 도도한 아름다움의 향기를 꽃 피우는 국화의 계절이 왔다. 소나무가 묻는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변하지 않은 의리를 지키며 살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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