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밀양 영남루 국보 만들기
진주성-밀양 영남루 국보 만들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10.11 18:14
  • 14면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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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향토사학자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향토사학자-밀양 영남루 국보 만들기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남원 광한루, 평양 부벽루 등을 우리나라 3대 혹은 대표 누각이라 호칭한다.

남원 광한루는 보물 281호 이고 밀양 영남루도 보물이지만 진주 촉석루 홀로 7등급에 해당되는 경남도 문화재 자료에 불과하다.

서울 남대문(숭례문)은 3천도 이상 뜨거운 열기로 목재 부문은100% 완전히 소실된 것과 같은데 문화재심의위원장 안모 교수는 상징성 때문에 국보를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촉석루와 영남루를 남대문 인근 또는 서울 근교로 옮기고 국보가 지정되면 다시 원위치로 옮길 필요성이 생긴다.

상징성을 강조하고 서울에 소재한다고 유리하고 또 지방이라고 홀대, 천대한다면 옮기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도가 생각되지 않는다.

밀양 영남루와 진주 촉석루를 국보로 승급하기 위해 필자가 처음으로 문제 제기를 했고 2013년 9월 밀양역 광장에서 72시간 금식, 단식하면서 서명을 받았다.

영남루는 밀양시 중앙로 324(내일동)에 소재하고 보물 147호로 낮아지는 수모를 당한지 33년이 지났다. 영남루는 정면 3칸 측면 4칸 일공식 겹처마 팔작지붕형 조선시대 건조물이다.

본래 신라시대 건립된 영남루는 영남사라는 절에서 유래했고 금벽루(金璧樓)라는 작은 누각이 있었고 고려 때 절은 없어지고 작은 누각만 남아 있었는데 고려 공민왕 14년(1365년)에 누각을 새로 짓고 절의 이름을 살려 영남루(嶺南樓)라고 명명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밀양도호부사의 객사인 부속 건물로 손님을 접대하거나 주변 경치를 구경할 때 사용되었다.

세조 6년(1460년)에 중수하면서 규모를 크게 지었고 선조 때 소실된 것을 인조15(1637년) 다시 지었는데 헌종10(1844년)년 다시 세우게 된다. 100여 년이 지난 1950년대 태풍과 폭우로 비가 새고 완전히 기우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 때 진주 촉석루 중건을 위한 국비가 하달되자 총액의 40%를 밀양 영남루 재건에 사용토록 경남도지사가 변경해 하달했고 진주시민들은 부족금액을 메우기 위해 기업체와 초·중·고 학생들에게 모금운동을 전개해 겨우 1959년에 중건하게 된다.

촉석루를 본 따서 만든 영남루가 국보가 되면 촉석루 역시 보물로 승급해야 마땅하다. 영남루, 촉석루 역시 상징성 때문에 등급조정이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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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제 2017-10-12 00:09:50
밀양 영남루 국보되면 촉석루는 어디로 가나 욕나온다 욕이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