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어느 할머니 이야기
도민칼럼-어느 할머니 이야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10.29 18:2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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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석/합천 수필가

이호석/합천 수필가-어느 할머니 이야기


나는 매일 아침, 마을 앞 황강 변 체육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나간다. 체육공원이라고 하지만 6만여 평의 부지에 운동기구 하나 없고, 간이 야구장 두 곳이 덩그렇게 건설되어 있고, 그 외 넓은 땅에는 온갖 잡초들이 활개를 친다. 그나마 외곽으로 자전거길이 만들어져 있어 인근의 사람들이 자주 나와 주로 걷기 운동을 한다.

강을 끼고 있는 공원 부근은 매일 같이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찬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막 지나고, 아침저녁 기온이 제법 싸늘하다. 여름내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 치던 잡초들이 어떤 것은 꺼뭇꺼뭇하고, 어떤 것은 푸르죽죽, 어떤 것은 누렇게 각양각색으로 단풍이 들고, 곳곳에 제멋대로 자란 갈대들이 허연 머리를 치켜들고 작은 바람에도 일렁인다. 또 얽히고설키며 제 영역을 넓히려고 기를 쓰던 칡넝쿨도 더 나가기를 멈추고 겨울 맞을 채비를 한다.

오늘 아침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매일 아침 만나는 그 할머니가 안개 속 저 멀리서 가물가물 걸어오고 있다. 할머니는 구순 노인으로 인근 ‘원폭 피해복지관’에서 기거하신다. 그런데 이 할머니 걷는 모습이 특이하다. 왜소한 덩치에 허리가 칠팔십 도로 꺾여 항상 지팡이에 의지하고 다닌다. 운동을 나와 걸을 때는 평소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양팔로 굽은 등 뒤로 받쳐 잡고 이쪽저쪽으로 휘저으며 휘적휘적 걷는다. 이삼백 미터를 걷고 나면, 지팡이를 앞으로 돌려 짚고 서서 굽은 허리 그대로 먼 하늘을 쳐다보며 잠시 쉬었다가 또 같은 모습으로 걷는다. 처음에는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아흔의 나이에 매일 아침 운동하러 나오는 것만도 대단하고, 생의 끝자락에서 건강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할머니가 복지관에 들어오신 것이 2008년이라고 하니, 십여 년이 되었다. 그때부터 몸이 아플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운동을 나오신다. 오랜 기간 같은 장소에서 마주치다 보니 가끔 같이 쉬기도 하고 과거의 얘기도 스스럼없이 주고받는다. 할머니는 일제 치하인 일곱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히로시마’ 가까운 곳에 살면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중학 과정인 고등과를 졸업하던 해, 열일곱 살 나이로 ‘히로시마 적금국’이라는 금융회사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한국인으로 공부하는 학생도 그리 많지 않았고, 그런 기관에 취업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대로 공부를 잘하였고, 당시 인정 많은 일본인 선생이 예쁘게 봐주어 그 회사에 시험을 치도록 알선해주었다. 무사히 시험에 합격하여 입사하였고, 즐겁고 희망찬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길지 않았다. 입사한 지 겨우 2년째인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 부모님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연고가 있는 고령군 쌍림면에 거주하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이웃 면에 사는 진주 강씨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그 후 여러 사정으로 남편과 떨어져 부산에 살면서 지금의 4남매를 혼자서 정말 어렵게 키웠다. 자녀들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 노력하여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지금은 모두 잘살고 있다. 맏이인 큰아들은 올해 일흔 살로 부산에서 공직생활을 마쳤고, 둘째인 딸은 올해 예순넷으로 역시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퇴직하였다. 그리고 셋째인 아들은 김해에 살면서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막내아들은 울산에 거주하며 대우건설에 입사하여 중동, 아프리카 등에서 현장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고 자랑을 한다.

할머니가 이곳 ‘원폭 피해자 복지관’에 들어오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1993년, 일본에 있을 때의 지인이 부산에 관광을 와 연락이 닿았다. 이 할아버지가 원폭 피해자 등록 수첩을 내는 과정과 여러 혜택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할머니는 바로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서류를 해주고, 당시 일본 원폭 피해지 거주확인은 자기가 다니던 옛 회사가 그대로 있는지 알아보고 거기서 재직 증명서를 발급받아 첨부하도록 부탁했다. 몇 개월이 지나고 등록 수첩이 나왔고, 그때 본인이 다니던 회사가 아직도 그곳에 있다는 것과 그 회사에서 일본에 올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들려 달라는 부탁도 전했다. 수첩이 나오고 3년, 일본에서 떠나온 지 꼭 50년만인 1996년 일본을 방문했다. 등록을 도와준 그분과 예전의 그 회사를 찾아갔다. 할머니가 들어서니, 전 사원이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회사의 대선배가 오셨다며 진정한 마음으로 반겨 주었다. 융숭한 환영을 받고 나올 때는 회사 간부들과 전 직원이 문 앞에 양옆으로 줄을 서서 배웅을 했다. 할머니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다며, 일본인들의 친절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할머니가 일본에서 학교에 다닐 때와 짧은 기간이지만 금융기관에 취직하여 좋아하며 들떠 있던 그때의 청순한 모습이 그려졌다. 할머니는 지금 사는 복지관 생활에 별로 불편한 것은 없지만, 가끔 외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나는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혼자이고 외로운 존재’라는 말로 위로를 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지만, 노년의 쓸쓸함은 지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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