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버릴 것과 남길 것
아침을 열며-버릴 것과 남길 것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11.26 18:1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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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버릴 것과 남길 것


은퇴한 지 한참 되는 은사 한분이 얼마 전, 애장하던 책들을 거의 전부 모 대학 도서관에 통째로 기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그 자리를 지켰던 한 동료교수가 그 사실을 전하며 은사님이 그 책들을 싣고 떠나는 트럭의 뒷모습에 거수경례를 하시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백발의 80대 노교수가 책을 싣고 떠나는 트럭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묘한 감동을 느꼈다. 아마도 그 책들은 그분에게 인생 그 자체였을 것이다. 내가 듣기로 그 책들 중에는 돈이 없어 헌책방에 팔았다가 나중에 돈이 생겼을 때 어렵게 되산 것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그 애착이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도 그분은 그것을 떠나보냈다. 나는 문득 그분의 서가에 남아 있었다고 하는 ‘몇 권의 책들’이 궁금해졌다. 그게 뭔지 아직도 여쭤보지는 못했지만, 그거야말로 진짜 책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었던 것들….

나도 이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아 조금씩 연구실의 책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대충은 이미 분류가 된다. 우선 논문들, 교과서들, 그리고 입문서, 안내서, 연구서, 잡지, 그런 종류의 책들은 아낌없이 버릴 생각이다. 정부에서 그리고 학교당국에서 쓰라고 쓰라고 다그치는 것들이다.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하찮기 짝이 없다. 나는 일단 ‘작품들’만을 남겨둘 생각이다. 그것들도 결국 언젠가는 버려야 하겠지만 그 선별은 나중에 가서 생각해볼 작정이다.

그런데 이게 그냥 책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매일매일 TV 채널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프로그램들, 특히 드라마들, 그리고 영화들, 그 중에서도 버려질 것들과 남겨질 것들이 있다. 결국은 작품성이 있는 것만이 남게 된다. 그중의 어떤 것들은 이른바 ‘고전’의 반열에 올라 영원성을 획득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주목하고 인정하고 소중히 할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별로 그렇지를 못한 것 같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건 경제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지식도 그렇다. 보도에 의하면 ‘가벼워진 인문학’이라며 대중들의 구미에 맞는 ‘넓고 얕은’ 것만이 인기를 끌고 그렇지 못한 깊고 묵직한 것들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간다고 한다. 그러면 세상의 천박화는 불가피하다. 이미 그런 세상이다. 더구나 그런 것이 돈과도 연결이 되니 그런 경향은 앞으로도 더욱 심화될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한번쯤은 반성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 시대가 과연 이대로 좋은 것인지.

문제는 ‘사람’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살고 있지만 결국 모두가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그 대부분은 사회와 역사의 기억 속에서도 버려진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 자취가 남겨진다. 저 책들처럼 사람도 또한 버려도 좋을 사람들과 남겨야 할 사람들로 분별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저 무수한 사람들, 특히 높으신 정치인들, 돈많은 부자들, 유명인사들, 그들은 과연 어느 쪽일까.

제대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마치 작품과 같다. 그런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의 이 대한민국을 만들어왔다. 지난 포항지진 때, 포항제철은 전혀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박태준 회장이, ‘호들갑’이라는 당시의 비아냥을 무릅쓰고 ‘수백 년에 한번 올 대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철저한 내진 건물을 지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면 그는 명품인간에 해당한다. 그는 남겨질 것이다. 박태준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나는 머릿속으로 몇몇을 헤아려 본다. 제법 있다. 역사는 개판인데도 그런 사람들이 제법 적지 않다. 그래서 이 나라가 재미있는 것이다. 각자 한번 리스트를 만들어보기 바란다. 버려야 할 사람과 남겨야 할 사람. 저 연구실의 책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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