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땅에 꽃 핀 통일신라 석탑
가야의 땅에 꽃 핀 통일신라 석탑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1.06.16 1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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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창녕술정리 동 3층석탑

▲ 창녕 술정리 동 3층석탑
신라 고도 경주, 그리고 신라 문화재의 정수라 하면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이는 70∼80년대 중·고교시절, 수학여행 필수코스이기도 했지만 교과서를 비롯해 인쇄매체에 워낙 많이 노출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 석가탑(국보 제21호)은 균형미와 안정적인 비례 미,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이 아름답고 수려한 석가탑에 버금가는 석탑이 우리의 고장, 창녕에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지역사람과 일부 문화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이 탑의 이름은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 1962년 12월 20일 국보 34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탑의 상륜부 일부가 훼손된 것을 빼고는 불국사 석가탑의 아름다움에 버금가거나 혹은 그 이상이다.
창녕읍 시장 안에서 작은 상가가 늘어 서 있는 사잇길로 들어가면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에 술정리 동 3층석탑이 있다.

▲일반인이라도 이 석탑과 첫 대면을 하게 되면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에 탄성을 내게 된다.
먼저 노르스름한 화강암재질에 6m에 가까운 훤칠한 키 높이에다 위풍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기본적으로 직선을 우선으로 하되 곡선은 아주 절제된 형태로 사용했다. 즉 몸돌과 기단석은 군더더기 없는 직선으로 처리했고 각 층의 지붕 선은 살짝 내리면서 유려한 곡선으로, 처마 끝은 살짝 들어 올려 경쾌한 곡선으로 처리했다. ‘거침없는 직선, 절제된 곡선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에 있다. 그것이 장중함으로 나타난다.
문화재 관계자와 조각가들은 ‘이에 대해 “간결하고 장중하며, 남성적이며 또한 안정된 균형미를 보여주는 국내 최고의 명품 석탑”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서부터 2개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상륜부는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여러 가지 환란을 거치면서 사라져 버렸다. 탑을 지키고 있는 혜일스님은 100년전 사진에도 상륜부는 없었다고 했다.
아래 1층부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4-4-2의 안정된 비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이다.
특이한 것은 2단으로 된 기단에는 위·아래층 모두 각 면의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겼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간 간결한 모습이며, 처마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고 있다. 석가탑과 비견되는 대목이다.
석탑 앞에 ‘동’자가 붙은 것은 인양사라는 절에 2개의 탑이 있어 붙은 것은 아니고 단지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들녘 한 가운데 있는 서탑과 구분하기위해 근세에 와서 붙인 이름이다.

▲석탑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점도 따로 있다. 석탑의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보호 철책을 따라 10여m 정도 이동한 뒤, 약45도 지점에서 바라보면 그야말로 매끈하게 잘 빠진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어떤 이는 불국사의 석가탑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이 방향에서 사진을 촬영할 때 훼손된 상륜부의 허전함을 대체하기위해 나뭇가지를 하나 걸친 뒤 촬영했다.(사진)

탑의 높이는 5.75m이고 상륜부에 해당하는 노반과 복발은 있으나 앙화가 사라진 것을 감안하면 전체적으로 7,5m정도가 될 것으로 보여 석가탑(8,2m)보다는 약간 작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신라의 탑 양식이 왜 이곳에 있는 걸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창녕지역은 오래 전 가야의 땅이었지만 삼국시대 이후 신라의 영역에 속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이 석탑 인근에 있는 또 다른 국보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 신라가 가야를 점령한 뒤 ‘우리 땅이요’ 하면서 세운 비다.
진흥왕 때 신라로 편입된 창녕지역은 신라의 군사 정치적 요충지가 됐다.
결국에는 신라의 영역이 되면서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창녕까지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당시 석탑의 발전 과정과 확산 과정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 창녕 술정리 동 3층석탑 출토 사리엄장구
▲특히 1965년 해체 수리과정 중 3층 탑신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사리장엄구 일체가 발견됐는데 그 안에는 청동 개형용기, 황색유리제 사리병, 향편, 작은 유리구슬 등이 나왔다. 현재 사리 8과를 제외하고는 국립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여기에는 사연이 하나 있다.
3층 석탑은 국보가 되기 이전부터 탑이 상층부가 훼손돼 방치되다시피 했다. 지금은 탑 주변으로 넓은 공터가 마련되고 일반인들이 쉽게 관람을 할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지만 당시에는 탑 주변으로 민가가 들어 서 있는 등 별 볼품이 없었다. 심지어 탑의 지대석 위로 민가 주택의 벽면이 가로 질러 자리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1965년에는 도굴범에 의해 도굴될 뻔한 적도 있다. 주민의 신고로  유물은 세상에 그 빛을 보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1966년 해체 후  복원절차를 밟았다. 이때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용기 즉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그러나 이 사리장엄구의 행방이 묘연해져 버린 것이다.
이를 찾는데 비구니승인 혜일 스님이 큰 역할을 했다.
혜일 스님은 13년전부터 3층 석탑 주변에 상주하면서 청소도 하고 정성을 다해 탑을 관리했다.
국보임에도 불구하고 관리가 잘 안돼 아이들이 탑에 올라가기도 하고 노숙자들이 들어왔으며 화투판도 벌어졌다. 스님은 이래서는 안되겠다싶어 3층 석탑 주변에 상주하면서 청소도 하고 정성을 다해 탑을 관리했다.
어느 날 스님은 ‘탑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었다’는 기록을 찾았다. 그리고 이것이 1965년 해체 복원과정에서 수습됐다는 사실을 알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출토유물에 대한 친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박물관 측에서는 ‘유물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때부터 혜일스님은 이 유물을 찾기 위해 각 언론사에 관련 자료를 보내면서 이슈화됐다. 문화재 관리가 엉망이라는 보도가 나가고 그때서야 박물관 측에서 부랴부랴 이 유물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2003년 2월 19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물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고, 뒤에 안 사실이지만 박물관 지하수장고에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그때서야 책자나 행정자료에 석가탑에 버금가는 석탑으로 소개글이 바뀌게 됐다.
그러나 아직 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 장엄구를 비롯한 유들이 문화재로서 지정되지는 않았다. 스님은 문화재 등록을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스님이 문화재 등록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국내에 현존하는 사리병중 가장 작다’는 것과 ‘담황색 병은 유일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혜일스님은 “이 탑은 천년(1300년 추정)이 넘는 시간동안 단 한번도 이 터를 떠난 적이 없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라며 그러나 저평가 되고 있는 것다”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어 “한 교수로부터 석가탑 제작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심지어 석가탑을 빚은 그 석공이 창녕 땅에 탑을 세운 것 같다는 견해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고 까지 했다. “석탑주변을 공원화하기 보다는 문화적 상징이 있는 사적지로 지정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다.
혜일 스님은 지금도 탑에 대한 애착을 갖고 관리하며 인근 인양사라는 절에서 매일 탑돌이를 하고 있기도 하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창녕들녘에 나가면 술정리 서 3층석탑이 나온다. 동 3층석탑보다는 훼손이 더 많이 됐고 크기도 작으며 정교함도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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