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진주성의 성돌(城石) 발굴
현장에서-진주성의 성돌(城石) 발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12.10 18:2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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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지역기자
 

최정호/지역기자-진주성의 성돌(城石) 발굴


진주를 일컬어 천년고도, 충절의고장, 역사의도시, 교육의도시라고 주저없이 즐겨쓰는 말이다.

공북문 입구 우측에 진주성 수축 관련 명문(晉州城 修築 關聯 銘文)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내용은 진주성 공북문 서편 성곽에는 진주성의 축성과 관련된 명문이 새겨진 돌이 두 개 있다. 이 명문은 1680년 진주성을 개축할 때 축성 작업의 일부를 담당한 사람들을 표시한 것으로 명문에는 강희 19년 산음(산청), 마병중초 사천, 곤양, 하동, 단성, 함양 등 여섯 개 관할구역(의 군사들)이 한 개의 초를 이루어 쌓았다고 새겨져 있다.

두 개의 명문은 어떤 구간인지는 알수없으나 한구역을 여섯고을 출신이 부대를 이룬 속오군(束伍軍)의 마군(馬軍) 중초(中哨)가 담당하여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로 1980년대 성벽 복원시 현재 위치에 끼워넣은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되어있다.

진주성은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년)에 진주목사 김광중이 석축하였고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 수가 수축하고 외성을 쌓았다 라고 되어있다.

진주성은 한때 경상우도의 거진(巨鎭)으로 임진왜란시에는 왜적의 호남진출을 막기위한 교두보 역할을 했으며 한산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 3대첩 승전지로 충절의 혼이 스며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진주성의 없어져버린 성돌들을 찾아 진주성곽 원형 복원을 단 1m라도 했으면 하는 염원을 버릴수가 없다.

현재 진주성 둘레 1760m 어느곳을 봐도 옛 성돌 성곽은 보이질않고 진주성지 정화작업때 암석을 깎아만든 성돌로 성벽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고려 우왕 5년 김중광이 석축한 이래 외침의 흔적이 고스란히 쌓여 그 시련과 고통, 환희의 기쁨을 함께한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성곽과 성돌이 흔적도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거진 역할을 한 성, 임란 3대첩 중 진주대첩의 장엄한 전투가 벌어지고 승리의 횃불을 높이 쳐들어 의주까지 도망갔던 군주를 원망하고 절망에 빠졌던 조선각지 민초들의 승전의 용기를 준 희망의 성, 김천일,최경회,황진 삼장사의 비통한 구국혼이 성돌마다 스며든곳, 계사년 전투에서 이름없는 민,관군들의 원한서린 사연속에 그 때를 고이 간직한 진주성 성돌들, 올곧은 절개와 기개 구국의 일념으로 손가락 마디마다 가락지의 비장함을 담은 애닯은 사연을 알고있는 진주성 성돌, 진주성 함락으로 왜적이 자행한 진주성의 초토화, 대 도살, 세계어느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그 당시의 처참했던 만행 이 모든 사실들을 진주성의 성돌들은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성과 비통함, 통한의 사실들을 성돌마다에 새기면서 함께해온 성돌들이 일제때의 성벽철거, 한국전쟁의 폭격피해로 성돌이 파괴되고 이후 새로운 도시계획 사업 등으로 성돌이 사라진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현존하는 성돌은 1980년대 성벽복원시 암석을 깎아만든 성돌이 성곽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진주성 성곽 원형 복원은 그때 당시의 성돌이 있어야 가능하리라 본다.

현재 진주시는 진주성대첩광장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 진주성대첩광장 조성 부지에는 진주성 외성의 일부분이었고 어쩌면 많은 성돌들이 숨도쉬지 못한채 지하에 매장되어 있으리라 추정해 본다.

10점이 있을지, 100점이 있을지, 1000점이 있을지 모르나 경건한 마음으로 발굴하여 소중히 다루어 나오는 숫자대로 성곽 원형복원에 쓰면 될 것이다. 성곽의 위치는 창렬사와 호국사 뒤편 옆의 성곽을 일부 허물고 그곳에 성돌을 쌓았으면 한다.

그곳은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충절들의 사당이있고 칠만 민,관군의 원혼이 서린 제향을 올리는 성스런 장소이기 때문이며 진주를 찾는 탐방객들이 진주를 찾을 때 촉석루만 보고 그냥가는 것이 아니라 진주성 성곽원형 복원지를 탐방하고 창렬사,호국사 참배까지 했을 때 진주성을 찾는 탐방객이 일정부분 이해를 하고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민,관이 하나되고 모두가 함께하여 천년고도, 교육의 도시, 역사의 도시, 충절의 고장에 걸맞는 진주정신의 정체성을 높이고 긍지와 자부심으로 가득 넘치는 진주인의 기상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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