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 화재와 상황의 힘
대구지하철 화재와 상황의 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2.27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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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갑/진주소방서 예방안전과장
대구지하철 중앙로역 구내에서 지적장애가 있는 50대 남자가 휘발유를 담은 페트병에 불을 붙인 뒤 바닥에 던져 총 12량의 지하철 객차를 뼈대만 남긴 채 모두 태워버린 사고.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당한 대형 참사. 바로 2003년 2월 18일 발생한 대구지하철 참사가 올해로 9주기를 맞았다.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안타까운 사고다. 헌데 참사 당시의 지하철 객실 내부가 찍힌 사진을 보면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사진을 보면 시커먼 연기가 뿌옇게 차는 걸 보면서도 사람들은 자리에 앉은 채 코를 막고 기다리고 있다. 참사 당시 희생자들은 연기 자욱한 객차 안에서 왜 한동안 머뭇거렸던 것일까. 물론 기관사와 지하철 공사의 잘못된 대응으로 피해가 커진 것은 분명하지만 당시 승객들의 행동은 일반적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흥미로운 다큐멘터리가 있다. 바로 EBS 다큐멘터리 ‘인간의 두 얼굴’이다. 이 프로그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행동을 다양한 실험을 통해 보여주고 그 결과를 전문가들이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5명의 학생이 한 교실에서 시험문제를 풀고 있다. 실제 실험자는 1명이며 나머지 4명은 다른 행동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받은 연기자들이었다. 한참 문제를 푸는 도중 갑자기 어디선가 연기가 스며들어온다. 실험자는 당황을 했는지 연기를 쳐다보기도 하고 옆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하지만 주위에선 별 반응이 없자 다시 문제를 푼다. 연기가 가득 차도록 말이다. 같은 상황에서 총 5번에 걸쳐 같은 실험을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실험자들을 인터뷰한 결과 주위반응을 살펴보긴 했지만 다들 가만히 있기에 자신도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전문가들은 연기가 들어오는 상황도 중요하지만 같은 상황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그 상황을 판단하는데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나라면 다르게 행동했을 텐데’라는 생각은 ‘상황의 힘’을 무시한 굉장히 오만한 생각이라고 지적한다. 상황을 조금 바꾸어 실험자 1명만 교실에서 문제를 풀어봤다. 문제를 푸는 도중 연기가 들어오자 실험자는 더 이상 문제를 풀지 않고 연기가 들어오는 곳을 응시하다 바로 탈출을 시도한다. 상황이 달라지니 결과도 달라졌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당시 희생자들도 당시 다른 사람이 가만히 있으나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빠져 상황의 힘에 지배당한 것은 아닐까. 당시 소수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열차가 계속 출발하지 않고 연기는 자꾸 차올라 문을 열고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상황의 힘을 이겨낸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은 상황의 힘에 압도되어 탈출시기를 놓쳐 문을 열지 못하거나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화재나 재난 등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사고에 마주하게 되면 인간은 패닉(Panic)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때 대부분 이성보다는 본능에 의존하여 행동하게 되는데, 이는 오히려 자신을 더욱 위험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 특히 지하노래방이나 영화관 등 다중이용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인간은 추종(追從)본능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누군가 먼저 움직이거나 방송에서 대피하라고 알려줘야만 그때서야 움직이게 되고 또한 비상구의 위치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앞선 사람이 도망가는 방향으로 따라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앞선 사람이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할 경우 비상구를 찾지 못해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되거나, 좁은 비상구로 많은 이가 탈출을 시도하다 넘어지거나 다쳐 사상자가 발생한다.

인간은 상황의 힘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상황의 힘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그 힘을 이겨낸다면 오히려 상황을 지배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화재와 같은 긴박한 환경에서 상황의 힘에 압도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다면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도 구할 수 있는 영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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