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길들여지기
아침을 열며-길들여지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1.14 17:5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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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진/망경초 교장·시조시인·아동문학가

김용진/망경초 교장·시조시인·아동문학가-길들여지기


오랜만에 이발을 하러 미장원에 갔다. 미장원이라고 하면 구시대적 이야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헤어숍이니 다른 다양한 이름보다 어쩐지 미장원이라는 것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아마 여태껏 미장원이라는 이름을 많이 들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머리가 자라 신경이 많이 쓰였기 때문에 간 곳이 미장원이다. 예전 같으면 미장원이 아닌 이발소에 갔을 것인데 요즈음에는 이발소 보다 미장원에 가는 것이 당연시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몇 번은 이발소를 찾아 갔었다. 그러다가 가까이 있고 깨끗한 미장원에 처음으로 가고 나서부터는 아예 이발소가 아닌 미장원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어릴 때 내가 자란 마을에는 미장원은 없고 이발소가 한 군데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마을에 있는 이발소의 주요 고객이었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미장원이 아닌 이발소에서 단발머리를 하곤 했었다. 지금처럼 전기에 충전을 하고 하는 이발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잡고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머리를 깎는 바리깡이라는 기계로 머리를 깎았는데 어떤 때에는 머리카락이 기계에 끼여서 난리가 나기도 했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이발소는 항상 만원이었는데 그 때에는 이발을 하는 아저씨와 이발을 배우려는 총각이 머리를 감겨주고 혹은 면도도 해주곤 하였는데 어린 아이들은 머리도 감겨주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읍내에 있는 미장원까지 가서 파마도 하고 머리를 감은채로 집에 왔다가 다음날 다시 미장원에 가기도 하였다. 그러던 것이 차츰 세월따라 미장원도 많이 생기고 이발소에서 하던 남자들의 이발도 차츰 미장원으로 옮겨서 하는 경우가 증가 하였다. 하지만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도 미장원에 가는 것이 마땅치가 않았다. 그래서 이발을 하면 꼭 이발소에 가야만 되는 줄 알았다.

여기에 이사를 오기 전엔 다른 아파트에서 20년이 넘게 살았는데, 이발소 한 곳에 거의 다니다가 그 이발소가 문을 닫는 바람에 다른 이발소에서 옮겨 이발을 하러 갔었다. 이발소엔 머리를 깎아주고 면도도 해주고 염색도 해주면서 머리도 감아주면서 값도 싸게 받았었다. 미장원은 면도도 해주지 않고 염색하고 머리 감겨주면서 값은 이발소 보다 더 비싸게 받았는데, 그렇다고 미장원 보다 이발소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겨울철이면 난로위에 물수건을 따뜻하게 해 놓았다가 턱 위에 올려놓아 피부를 따뜻하게 하여 면도를 해주곤 했는데, 의자를 뒤로 눕혀서 얼굴 전체를 면도하기 때문에 잠시 잠이 들곤 하였다. 그리고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시는 분은 항상 남자가 했었기 때문에 미장원에는 여자가 머리를 손질해 주는 걸로 알았었다. 요즈음처럼 미장원에서 머리를 손질하는 유명한 사람 중에는 남자가 많다는 것을 그 때에는 몰랐던 것이다.

사람은 어떤 일에 대하여 길들여지면 그 습성에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기도 하다. 나 자체가 겪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발소에만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다녔었는데(우리 집 아들들은 자라면서 이발소 보다는 미장원을 택해서 가서 머리를 손질해도 나는 이발소만 갔었다.) 지금은 바뀌어 이발소보다는 미장원에 가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소하거나 색다른 일을 만나면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선뜻 하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그러한 것에 대하여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 사회에는 창의성과 협력하려는 힘이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들은 그기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창의성, 협력하는 자세를 기르고, 다른 어떠한 상태에도 도전할 수 있도록 길들이는데 힘을 쏟아야, 우리의 미래는 더욱 밝아지고 희망차게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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