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사천 출신 항일투사 정한영
진주성-사천 출신 항일투사 정한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2.07 18:4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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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사천 출신 항일투사 정한영


경남 사천시 동동 295번지 출신 정한영(鄭漢永)선생은 학생시위와 독서회 사건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른 분으로 사천을 대표하는 항일투사이지만 사천(삼천포)에는 기념사업을 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고 국립현충원에도 안장되지 않았다.

정한영(1912~1975)선생은 1930년 1월 16일 경남 진주소재 진주고등보통학교 2학년 재학 중 정갑생, 서정태, 김병호 등과 함께 학교 내 기숙사에서 광주학생시위 투쟁에 동참하기 위해 항일독립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면서 바로 옆 일신여고(진주여고 전신)로 달려가 시위 동참을 권하자 여고생 수 십 명이 동참해 교문을 벗어나 진주시내로 진출해 시위를 전개하자 시민들도 일제히 동참하고 박수를 치고 호응했다.

동아일보 1930년 2월 20일자 5월 16일자에 보도되고 《고등경찰관계적록》에도 기재되었다.

일경에 피체된 정한영 선생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30년 3월 18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주거침입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검사가 공소하여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4월 5년간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정한영 선생은 동아일보 사천지국 기자가 되어 사천기자회를 창립할 때 앞장 서고 사천(삼천포)지역 야학교 설립과 운영 문제, 소작인의 어려움을 위해 토론하자고 제안했다.

1930년 6월 삼천포에서 최복근 등과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고 1931년 3월 박대영, 이금복, 최복근 등과 함께 노동자 농민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피체되었다.

동아일보 1931년 12월 6일자. 동아일보 1932년 8월 12일자와 《사상월보》1호~6호중에 539면~569면 등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는데 약 1년 만에 경찰서에서 만난 조선인 형사의 혹독하고 무지한 고문을 받고 혼절하기도 했다.

1933년 1월 31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고 3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5월 22일 고등법원(서류상 재판)에서 기각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정한영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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