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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조선 여인 잔혹사(Ⅰ)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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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2  18: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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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조선 여인 잔혹사(Ⅰ)

날만 새면 성희롱이니 성폭행이니 성에 관한 사건이 하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니 ‘조선시대 여인의 잔혹사’를 2회에 걸쳐 되돌아보고자 한다. 창세기에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한 배필로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딱하여, 전적으로 남자를 돕는 배필의 역할을 받은 것이 여자라는 존재다. 그러나 남자들이 자신의 영원한 동반자로 지어진 여자를 학대하면서 창조 질서에 혼란을 빚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조선시대를 살았던 여자 중에,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을 남긴 여성들의 이야기는 되짚어보기도 끔찍할 정도다. 음란하다는 이유 한 가지로 참혹하게 살해되고, 첫사랑을 잊지 못한 죄로 참수형을 당한 여인, 그리고 전처의 자식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박살(撲殺)을 당한 여인들의 사연 앞에서 이 시대의 우리는 모두가 옷깃을 여며야만 할 것 같다. 당시의 사회제도와 남성들은 어떻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었던가? 우리는 요즘 무심하게 ‘박살을 낸다’는 말을 자주 쓴다. 그러나 ‘박살’이야말로 형벌 중에 가장 끔찍한 형벌이었다. 죽을 때까지 매를 때려서 죽이는 형벌이었다. 간음을 하면 남자들은 벼슬에서 파직되거나 귀양 가는 것에 그치지만, 여자들은 최고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태종 때 14세의 소년을 사랑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늙은 관찰사에게 시집가야만 했던 유씨가 옛 사랑을 잊지 못해 다시 그를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발각되자 남자는 귀양을 가고 여자는 참수되었다.

조선시대는 여자들에게 절개를 강요했다. 절개는 개가(改嫁)하는 것을 억제했고 남편을 따라 죽어야 열부(烈婦)나 절부(節婦)가 되어 훌륭한 여인으로 칭송 받고, 개가를 하면 실절(失節)했다고 하여 가문(家門)의 수치가 되고 직계 가족들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했다. 단순하게 음란하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이유만으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살해하거나 오라버니가 여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여자들이 더욱 불행해진다. 적국의 병사들에게 유린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당한 여자들은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쫓겨나기도 했다. 갈 곳이 없는 여자들은 자살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수많은 양반가의 여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강화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기록에만 60명이 훨씬 넘는다. 강화도 방어의 책임을 맡았던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는 부인들이 대책을 묻자 빨리 자결하라고 부인과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를 다그치기까지 했다. 결국 김경징의 아내 박씨, 김진표의 아내 정씨는 자살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강화도 방어의 책임을 맡은 김경징과 아들 김진표는 비열하게 달아나서 두고두고 양식 있는 사대부들의 비난을 받았다. 여자들의 가장 큰 고통은 사랑이다. 남자는 1처 2첩, 3첩을 거느리며 여종들을 비첩으로 삼는 일도 있으나, 여자들은 결코 두 남자를 거느릴 수 없었다.

태종 때 박저생의 여종 파독(波獨)은 여종으로서 주인의 첩이 된 여자였는데 아들의 첩을 아비가 취하고 아비가 죽자 아들이 다시 첩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을 살았던 여자들은 종이다. 여종들은 관노(官奴)와 사노(私奴)로 구별되는데, 관노든 사노든 15∼16세가 되면 탐욕스러운 주인의 성적인 노리개가 되었다. 주인을 거절하면 매를 맞다가 죽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주인이 종을 학대하거나 살해해도 관청에 고발할 수가 없었다. 종의 신분은 세습이 되었다. 특히 종모법이라고 하여 종의 자식은 어미가 소속되어 있는 주인에게 세습되었다. 종이 되는 것은 나라에 죄를 지은 경우 그 가족들을 관비로 보내거나 공신들에게 노비로 하사한 경우가 많았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 한명회 등과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그 가족들을 공신들에게 노비로 하사했다. 사육신이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다가 실패했을 때도 그들의 가족들 수백 명이 모두 노비로 전락했다. 또한 조선시대에 신분적으로 고난을 받은 여자들은 기생들이다. 특히 관기의 경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관리들의 수청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하여 자식을 낳아도 남자는 양육에 대해서 의무도 없고 책임도지지 않았다. 아들을 낳으면 관노나 천민이 되고 딸을 낳으면 기생이 되어 어머니의 업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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