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독립문(獨立門) 건립
진주성-독립문(獨立門) 건립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2.27 18:3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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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독립문(獨立門) 건립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로 우리나라 자주독립 정신을 알리고자 만들었는데 그 장소는 임금이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으로 나아가서 칙서(勅書)를 맞이한 곳 모화관과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곳에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을 짓기로 결정했다. 1895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켜 일년 후 청나라가 패하자 조선은 청나라를 섬기는 나라가 아니라 자주국가임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했다. 사대주의 상징인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을 세우기로 하였다.

서재필(1863-1951 독립운동가)을 중심으로 이상재, 윤치호, 이완용 등 조선 정부관료들이 대거 참여하여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를 발족 독립협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서대문에 있는 영은문 자리에 세우기로 하고 모금운동을 벌였다. 독립문 모양은 프랑스 개선문을 본떠 서재필이 설계(스케치)하였다. 조선왕실도 참여하여 큰 돈을 기부했다. 1896년 11월 21일 시작된 독립문 건립공사는 이듬해인 1897년 11월 20일 1년 공사로 끝이 났다. 독립문이 완공되기 한달 전 1897년 10월 고종 임금이 독립협회 지원에 힘입어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이로써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다. 독립문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와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을 새긴 것도 그 때문이다. 1910년 우리나라가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자 일제는 독립문을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 일본 영향 아래로 들어왔다는 의미로 이용하려고 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독립문 보수 공사를 벌이고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기도 했다. 이완용 등 친일파가 당시 독립문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독립협회 회원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한국인의 반일(反日) 감정을 누그러뜨리려고 한 짓이다. 독립문에 새겨진 한자 한글 현판 글씨는 친일파인 이완용이 썼다는 설이 있으나 독립문을 세울 당시 독립협회 위원장을 지냈고 건립 때 가장 많은 돈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반면 독립운동가인 김가진(1846-1922)이 썼다는 주장도 있다.

독립협회 창립 회원이었고 당대 글씨를 가장 잘 쓰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여러 현판 글씨를 써왔기 때문이다. 감정결과 필체가 비슷하다는 감정이 나왔다.

1919년 3.1운동 때는 태극기의 정확한 모양을 알지 못했던 많은 학생과 시민이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를 보고 따라 그리며 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독립문은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자주독립의 상징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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