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고 가난한 사람
착하고 가난한 사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3.1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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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옥/작가ㆍ약사
어릴 때 읽은 동화책은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 얘기로 가득했다. 형의 핍박을 받는 ‘착하고 가난한’ 동생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라 세계 전래동화 여러 곳에 등장하고 있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기성 사고로부터 주입되는 효과란 생각보다 커서, 나는 착한 사람이 되기는 글렀구나 가난하게 살기는 싫으니까, 하고 낙담했었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위인전 읽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숙제 때문에 읽기는 했지만 딱 그 정도의 의무감뿐이었지 흥미도 감동도 없었다.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이란 게 도무지 나와 같은 부류라 여겨질 만한 동지적 특성이 하나도 없어서, 내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됐다.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줄기차게 세뇌하는 책을 좋아할 아이가 있겠는가. 나는 그러니까 내겐 '싹수'가 없구나 하고 지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 어디에도 그럴만한 자질이 없어 보였다. (잘못된 자기암시와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는 위인전 시리즈 같은 것들이 아직도 나오고 있을까.)

약국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온다. 나라에서 가난하다고 인정한 사람들, 즉 의료보호 환자들이다. 우리 국민의 평균 약제비 부담금은 8만 원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500원 혹은 무상으로 주로 수만 원 대의 장기 처방약을 타 간다. 그들 대개의 입성이 나보다 나을 때가 많아서 놀란다. 가난하다고 장신구를 걸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겉으로 드러난 반지나 목걸이가 모조품이 아님을 알고 또 놀란다. 대화 내용으로 짐작해보건대 그들은 '가난'하지 않은 것 같다. 약국에 자주 오는 의료급여 대상자 한 분은 아들 며느리에 친지들에게까지 영양제를 사서 쥐여 주며 으스대고, 명절이라며 병원 간호조무사들에게 선물세트를 건넨다.  

내가 그들을 마뜩찮게 여기는 이유는 국가의 돈, 시민이 낸 세금으로 그 많은 약을 타간다는 사실이다. 만성질환이 있다면 약을 복용하는 것이 맞겠지만 실제로 복용을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 것이,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또 처방전을 들고 오기 때문이고, 복약지도를 하면 전혀 듣지도 않을 뿐 아니라 통에 그냥 담아주세요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의사의 처방이 달라져 늘 복용해오던 약이 아니어도 따지지도 묻지도 않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처방전을 이 약국으로 특별히 가져 오는" 것을 생색내며 거들먹거리는 태도까지 보이기도 해서, 처음 의약분업이 시작되었을 때 돈을 내지 않는 급여환자라 미안해하며 주눅들어하던 모습은 전설이 된 지 오래라고 선배들은 말한다. 

우리나라 의료보호제도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세세한 내용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 의미나 가치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나라에 공을 세운 분과 그 가족에게 혜택을 주는 경우도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선가는 도덕적 해이가 심각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예상은 해볼 수 있다. 귀한 나랏돈이, 국민이 낸 세금이, 내 아들과 딸들의 미래가 줄줄 새 나가는 구멍이 바로 거기라는 생각을 하면 때로 분노가 치민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이들의 어깨는 충분히 무겁다.) 도덕적 불감증과 업무 태만과 정치적 잇속 속에 꼼꼼히 따져보는 이 없이 이렇게 방치된 가운데 누가 이익을 보는가. 약국도 얼마간 수혜를 보겠지.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의료보호 환자를 유치해 처방전을 남발하는 병원도 그 책임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어릴 때 읽은 동화와 달리 가난한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착한 사람이 아니라면, 힘들게 일해 ‘착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먹여 살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도 있다. 빈곤과,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보호해주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엄격한 기준과 관리가 절실하다. 세상이 변하고 동화의 주인공이 바뀌어도 착한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주제만은 잃고 싶지 않은 건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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