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중국 난징(南京) 대학살 사건
진주성-중국 난징(南京) 대학살 사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4.10 18:4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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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중국 난징(南京) 대학살 사건


1910년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일본은 1920년대 경제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 자원과 물건을 더 많이 내다 팔 시장이 필요했다. 일본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새로운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찾던중 그때 중국에서 장제스(대만 지도자)의 국민당과 마오쩌둥(훗날 국가주석)의 공산당간에 내전이 벌어져 이를 ‘국공내전’(1927-1936)이다.

중국이 정치적 대혼란에 빠지자 이를 틈타 일본은 1931년 중국 만주 지역을 침공 그들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꼭두각시 나라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은 중국 영토를 많이 장악하고자 호시탐탐 전쟁을 일으킬 기회만 노리던중 1937년 결정적 사건이 벌어졌다.

7월 7일 밤 베이찡(북경) 외각의 루거우차오(다리) 근처를 정찰하던 일본군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총성을 듣고 긴급히 인원을 점검 병사 한명이 용변을 보는 중 10여분을 지나 부대로 복귀 일본은 이를 꼬투리 잡아 중국이 일본을 공격 루거우차오 지역을 점령 중국에 전면전 전쟁을 선포 8년에 걸친 중일전쟁이 시작 일본은 속전속결로 중국 주요 도시를 장악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잡고 일본에 대항했으나 속수무책 3개월간 치열하게 대항했으나 결국 전쟁은 지고 말았다. 일본군은 도망치는 중국군을 파죽지세로 추격 1937년 12월 9일 당시 중국 수도인 난징을 포위 장제스 등 중국 관리들은 대피했고 수도를 충칭으로 옮겼다. 일본군에 포위된 난징사람들은 공포에 떨어야만 했고 일본군이 중국군을 꺾었다며 항전의지를 잃고 점령하는 도시마다 민간인 살상 강간 약탈 등 무차별 자행 살아있는 생명체는 개뿐이었다. 10만 명이 넘는 인구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의 만행은 절정에 달했다. 난징을 파괴한 일본군은 1937년 12월 13일 포로로 잡은 중국군인들을 마구 죽였고 민간인도 붙잡아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난징에서 20만-30만명이 비참하게 죽었다. 8만명의 중국여성도 강간 등 피해를 보았다. 많은 여성이 피해를 당한 다음 살해당하거나 자살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이 패하면서 중일전쟁도 끝이 났다. 난징 대학살 주동자에 대한 재판에서 학살을 주도한 일본인 장교 4명만이 처형됐고 학살자는 법정에 오르지도 못했다.

지금도 중국은 일본에 난징 대학살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일본은 학살이 있었다 할지라도 정부에서 개입하지 않은 개인의 일탈 행위였다며 공식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는 난징대학살에 대한 추모의 날을 12월 18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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