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의 詩 산책-우리는 ‘그 날’을 살고 있다
김지율의 詩 산책-우리는 ‘그 날’을 살고 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4.26 18:5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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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우리는 ‘그 날’을 살고 있다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중략)/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 날’ 부분)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일들이 지나간 오늘이다.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스쳐간 오늘이다. 일곱 시에 기차 대신에 차를 타고 아홉 시에 학교 대신에 직장을 가며 세상은 완벽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목련이 지고 벚꽃이 떨어지고 어디서 또 그만큼의 꽃들이 필 것이다. 제 각기 다른 목소리로 노래하는 새들과 또 목숨을 걸고 날개 짓을 하는 저 벌과 나비들을 우리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 시에는 70년대의 유신과 과도한 경제개발로 근대화되는 모순적 현실에 저항하는 시적 자아의 병적이고 폭력적인 모습들이 등장한다. ‘그 날’의 풍경들은 혼란스러운 그 시대와 현실에 대응하며 하루하루 버틴 그들의 혹은 우리들의 일상이다. 그래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마지막 행에서 여전히 뭉클하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그 날’을 살고 있다. 그날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며, 그날 바위에서 뛰어내린 그의 속보를 텔레비전의 자막으로 보며, 그날 우리는 많은 촛불 속에서 간절하게 손잡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우리는 그토록 많은 그날들을 견디며 나의 고통을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공유했고 공감했다. 함께 있었지만 모두 각자 부끄러웠고 아픈 그날들이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 집은 초록 대문이고 여기서 딱 열 걸음 걸으면 맛있는 빵집이 나온다. 저쪽에서 달려오는 개들은 깡충 지나가고, 약속 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달리면서 재벌 3세가 던진 물 컵을 떠올렸다. 이렇게 지나간 오늘도 언젠가 ‘그 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한 기억보다는 아픈 기억을 더 많이 더 오래 기억한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 중의 하나는 지금 내가 ‘아프다’는 사실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연두 빛으로 변해가는 가로수 잎들을 보며 무빙워크에 일주일치 먹거리를 담으며 오늘도 생각한다. 내가 했던 가장 비열한 방식의 타협과 무뎌져가는 비판력 앞에 ‘그 날’의 신음소리와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 날’은 과거의 어느 날이지만 지금 살고 있는 현재이고,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의 어느 날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수한 ‘그 날’을 건너왔듯이, 언제나처럼 무수한 ‘그 날’을 또 꿋꿋이 살아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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