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의 詩 산책-죽은 이가 꾸다 버리고 간 꿈을 꾸고 있는 시간들
김지율의 詩 산책-죽은 이가 꾸다 버리고 간 꿈을 꾸고 있는 시간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5.08 18:3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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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죽은 이가 꾸다 버리고 간 꿈을 꾸고 있는 시간들


루마니아 사람들은 죽기 전 누군가에게/ 이불과 베개와 담요를 물려준다고 한다/ 골고루 배인 살냄새로 푹 익어가는 침구류/ 단단히 개어놓고 조금 울다가/ 그대로 간다는 풍습// 죽은 이의 침구류를 물려받는 사람은/ 팔자에 없던 불면까지 물려받게 된다고 한다/ 꼭 루마니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죽은 이가 꾸다 버리고 간 꿈냄샐 맡다보면/너무 커져버린 이불을, 이내 감당할 수 없는 밤은 오고/ 이불 속에 불러들일 사람을 찾아 꿈 언저리를/ 간절히 떠돌게 된다는 소문// 누구나 전생을 후생에/ 물려주고 가는 것이다. 물려줘선 안 될 것까지/ 그러므로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이들 중 누군가는 / 먼저 이불 속에 묻히고//이제는 몇 사람이나 품었을지 모를/ 거의 사람의 냄새 풍기기 시작한 침구류를 가만히 쓰다듬다가/ 혼자서 이불을 덮고 잠드는 사람의 어둠/ 그걸 모두들 물려받는다고 한다/ 언제부터 시작된 풍습인지/ 그걸 아무도 모른다. (황유원, ‘루마니아 풍습’)

아주 어렸을 때 눈을 오래 감고 있으면 어쩌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했다. 할머니도 눈을 감고 오래 잠을 자다 돌아가셨다. 아마 긴 꿈을 꾸다가 길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불 속에서 밤새 꿈을 만들다가 잠이 들곤 했다. 헨젤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숲속에 떨어뜨린 빵조각처럼 꿈을 꾸면 다시 눈을 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시는 죽은 사람이 덮고 자던 이불을 산 사람에게 물려주는 루마니아 풍습에 대해 서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자신이 덮던 이불을 ‘단단히 개어놓고 조금 울다가’ 눈을 감는다는 풍습은 슬프고 아름답다. 한 사람이 덮던 이불과 베개에서는 그 사람의 냄새가 베여있다. 기쁘고 슬픈 일이나 많은 밤을 새웠던 고민의 흔적들을 착한 담요와 이불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덮던 이불과 옷들을 큰아버지는 강둑에서 모두 태웠다. 그것을 한참 지켜보며 나는 이제 할머니가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매일 매일이 익숙한 죽음이고 매일 매일이 새로운 죽음이다. 가까이 있던 가족과 친구가 혹은 멀리 있던 그들의 죽음이 전해진다. 누군가의 전생을 후생에 물려주고 홀연히 떠난 그들을 기억하는 오늘. 그렇게 ‘죽은 이들이 꾸다 버리고 간 꿈’을 대신 꾼다는 것은 어쩌면 그들을 더 오래 기억하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한 시인의 죽음을 들었다. 아주 가까운 관계는 아니지만 가끔씩 얼굴을 보면 인사를 하는 사이였다. 그즈음 건강의 문제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폰을 보다가 아직 지우지 않은 그녀의 카톡 배경을 한참 보았다. 빨간 가방을 들고 허공을 걸어가고 있는 뒷모습의 조각상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다가올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문득 그녀가 꾸다 버리고 간 꿈들이 무엇이었는지 자주 생각되는 봄밤이다. 부디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푸른 오월을 맞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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