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院)의 역사
서원(書院)의 역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3.1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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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 상봉동동 문화위원
조선시대의 서원은 강학과 선현의 제향을 위하여 조선중기 이후에 사림에 의하여 향촌에 설립된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 운영기구였다.

서원은 제향과 강학의 기능을 가진 점에서는 관학과 차이가 없었지만 제향의 대상이 공자와 그의 제자인 성현이 아닌 선현이며 설립의 주체가 중앙정부가 아닌 사림이고 설립의 배경이 성균관이나 향교와 같은 관학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는 경상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에 의해 1543년 순흥에 건립된 백운동 서원이다. 백운동 서원이 자리잡은 순흥지역은 소백산의 산자락 속에 위치한 풍기의 이웃마을로 안향이 살았던 곳이다.

그 후 1548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이황은 백운동서원을 공인화 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에게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를 허락한 명종은 1550년 2월에 소수(紹修)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렸고, 이것은 조정에 의하여 성리학의 정통성이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서원이 갖는 중요한 기능인 선현의 봉사(奉祀)와 교화(敎化)사업을 조정이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원의 수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자 영조는 서원건립을 금지하고 사액을 일체 불허하였다. 서원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뿌리뽑기 위한 방책으로 서원이 훼철된 것은 조선말기 고종 때 집정한 흥선대원군에 의해서이다.

대원군은 철폐령을 내리고 1871년 사액서원 중 봉향인물이 문묘종사자 및 충절대의가 뛰어난 자가 아니면서 첩설한 서원은 철향명령을 내리고 봉향자 일인일원의 원칙으로 전국 47개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훼철했다. 그러나 훼철된 서원 가운데 상당수가 복고적인 선비들에 의하여 다시 복설되어 현재 전국에 900여 개소가 있는데 영남권에 470개소로 50%를 점하고 특히 경북권내에 290여 개소로 많은 서원이 현존하고 있다.

서원이 설립된 장소는 존경받을 만한 선현의 일정한 연고지나 고향을 중심으로 이곳에서 사람들이 은거하여 수양하며 독서하기에 좋은 곳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하여 산수가 뛰어난 곳이다.

1550년 문헌서원(최충), 영천의 임고서원(정몽주), 함양의 남계서원(정여창) 순으로 설립되었고 동방오현으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문묘에 종사되었다.

서원은 향교와 달리 사학으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위치하며 환경의 유혹에서 벗어나 학문연마로 교육적 성과가 크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물이 흐르고 산이 있어 풍월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자연에 서원을 건립,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 선현을 뫼시고 제향을 올리는 성리학사상의 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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