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의 詩 산책-그래,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김지율의 詩 산책-그래,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5.22 18:2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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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그래,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 ‘강’)

말하자면, 이 시만큼 삶과 사랑에 치열하고 따뜻한 시를 보지 못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강가에서 눈도 마주치지 말자고 어깃장을 놓는 시인의 마음이 진심일지라도 나는 이 시가 왜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외롭고 괴로운 날들, 그래서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날들. 복장 터지는 그 많은 이유에 대해 절대 나한테 말하지 마!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는 선언들이 매력적으로 마음에 든다. 차라리 강에 가서 당신이 직접 말하라는 치사함이 정말 마음에 든다. 서로의 웃긴 몰골에 대해 눈도 마주치지 말고 설사 마주치더라도 못 본 척 하자는 말이 더없이 인간적이다. 치명적이게 인간적이다.
서로의 바닥을 보여준다는 것.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을 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몇 명이나 만날까. 어처구니없는 삶과 더 어처구니없는 사랑이 이렇게 처참하게 우리를 때릴 때 그러니 당신, 우리 강가에 가서 실컷 말하고 통쾌하게 울자. 혹시 마주치더라도 절대 눈은 마주치지 말자!

이 시를 쓴 인숙 씨는 정이 많고 따뜻한 시인이다. 문단의 한참 선배를 인숙 씨라 말하는 건 무례하겠지만 두해 전 시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문인은 ‘쪼다’ 같다거나, 인터뷰를 하면 없는 밑천까지 보여야 하니 손해 보는 기분이라고 했지만, 억울하게 당하거나 손해 보더라도 시인 황인숙은 모든 것에 솔직하고 따뜻했다. ‘<동사서독>에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당신은 내 옆에 없었더랬죠’ 이런 대사가 사람을 홀린다’고 했던 인숙 씨! 아름답고 쓸쓸하다는 말을 가장 멋지게 할 줄 아는 시인이다.

차라리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고, 이 순간을 정직하게 부서지고 정직하게 무너지자고 하는 편이 솔직하겠다. 가난한 나의 언어가 당신이 미쳐버리고 싶을 만큼 힘든 마음에 닿을 리 만무할 테고 그냥 모르는 척 있다가 ‘그래, 다시 돌아왔구나’ 기다렸던 말을 해줄 뿐. 오늘 오후 화장실에서 마주친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 작은 화분을 주고 간 그녀의 말없는 뒷모습이 오래도록 먹먹해지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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