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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문화의 소비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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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27  19: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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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문화의 소비

한때 우리는 이웃 일본인을 “경제적 동물”이라는 말로 경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는 아직 경제적 궁핍을 벗어나지 못했고 일본은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제 어떤 점에서 일본 이상의 경제적 동물이 된 우리는 더 이상 아무도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가히 경제만능, 자본만능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비록 자본의 폭주에 대해 깊은 우려를 하고 있긴 하지만 나도 경제의 중요성을 경시할 만큼 철없는 철학자는 아니다.

생산과 소비는 인간생활의 필수불가결한 한 부분이다. 그 양자를 움직이는 동력으로서의 자본은 화력보다도 더 큰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인간적 삶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좀 묘한 현상이 있다. 생산과 소비의 그 거대한 사이클의 한 부분에 ‘문화’라는 것이 무시 못 할 지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엄청난 규모로 문화라는 것을 생산해내고 있으며 그것을 또한 엄청난 규모로 소비하고 있다. 음악과 미술을 위시한 대표예술을 비롯해서 연극, 영화, 만화, 드라마 등 그 장르도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기본적인 의식주도 이미 그 절반은 문화의 영역에 걸쳐 있다. 패션이며 구르메며 인테리어 같은 말들이 그것을 알려준다. 이른바 출판도 아마 문화에 해당할 것이다.

최근에 한 출판사로부터 헤르만 헤세의 시집을 번역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출판 자체가 거의 고사생태이긴 하지만 헤세의 시집은 그래도 좀 팔릴 거라는 격려의 말도 곁들여줬다. 그 힘든 작업을 나는 비교적 신이 나서 해치웠다. 그리고 그 사장의 말대로 좀 팔리기를[소비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시집의 생산과 소비가 이 사회의 정서적 건전성을, 내지는 교양의 수준을 담보하는 시금석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겠지만, 나 자신의 청춘의 한 부분이었다. 그의 시 <안개 속에서>는 고등학생 시절 내내 작은 액자에 고이 모셔져 내 책상 한 구석을 장식했었다. 그것은 그의 <데미안>과 더불어 내 정신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오토 쉬너러의 소설 <황태자의 첫사랑>도, 테오도어 슈토름의 소설 <이멘 호수>도, 기타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소설과 시들이 내 손 안에 쥐어졌었다. 나는 그 많은 것들을 왕성하게 소비한 소비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많은 것들을 생산한 생산자가 있었던 셈인데 그때는 그것을, 특히 그 고마움 내지 소중함을 잘 모르고 있었다.

때마침 우연히 돌리던 티비 채널에서 <괴테!>라는 영화를 방영하고 있었다. 독일영화였다. 나는 곧바로 몰입했다. 40여년 전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한 순간에 되살아났다. ‘로테’라는 핑크빛 이름이 다시금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가련한 베르테르[정확하게는 베르터]는 아직도 내 깊은 곳에서 죽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문화상품을 생산해준 괴테가, 그리고 필립 슈톨츨 감독이 고마웠다.

고마운 게 어디 그들뿐일까. 내 서가에 한 가득이다. 저 많은 시들, 수필들, 소설들, 그리고 DVD로 꽂혀 있는 드라마와 영화들, 그리고 CD로 꽂혀 있는 음악들, 김은숙의 드라마들도 거기서 빠질 수 없다.

그런데 헤세의 시들 중에는 <어느 편집부에서 온 편지>라는 작품이 있다. 자신의 시집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편지의 내용과 그 비애를 표현한 시다. 좀 딱해서 그걸 수록하지는 않았다. 나는 편집부에서 미리 제안을 받은 것이니 헤세 본인보다는 신세가 훨 낫다. 뒤늦게나마 이곳 한국에서라도 자신의 시집이 잘 팔린다면 죽은 헤세도 아마 기뻐할 것이다. 잘 팔려서 독일친구들에게 자랑 좀 할 수 있게 된다면 나도 좋겠다. “한국에선 아직 문화가 살아 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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