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마부작침(磨斧作針)·우공이산(愚公移山)
칼럼-마부작침(磨斧作針)·우공이산(愚公移山)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5.28 18:5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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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마부작침(磨斧作針)·우공이산(愚公移山)


두보(杜甫: 712∼770)와 더불어 중국 당나라 때 한시(漢詩) 문학의 양대 거성(巨星)으로 불렸던 이백(李白: 701∼762)이 한때 산에 들어가 학문을 익힐 때 하루는 공부에 싫증을 느껴 산을 내려가다가 냇가에서 도끼를 바위에 갈고 있는 노파를 보고 물었다. “무슨 일로 도끼를 바위에 갈고 있습니까?” “바늘을 만들려고 한다오” 이백이 기가 막혀 다시 물었다. “어느 세월에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듭니까?” 노파가 도끼를 갈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하다가 그만두지 않는데 왜 바늘 될 날이 오지 않겠소?” 말을 마친 노파는 다시 손을 놀려 도끼를 갈기 시작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이백은 집으로 가려던 발길을 되돌려 산으로 올라갔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의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사자성어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산을 퍼서 옮겨 놓으려 했던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주인공 우공도 자자손손 이어가며 한 삽 한 삽 퍼내다 보면 결국 큰 산이라도 옮길 수 있다고 믿으면서 흙 나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시선(詩仙) 이백을 깨우치게 한 노파의 주름진 손을 떠올리고, 산을 옮기겠다는 어리석은(愚) 노인에게 공(公)이라는 존칭을 붙인 겸손함을 생각한다. 배움이 책 속에만 들어 있지 않고 귀인에게서만 받는 게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무슨 일을 하다 보면 열심히 하는데도 일이 잘 안될 때가 있다. 살아가다 보면 대패질을 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더 길 수도 있다. 붓을 들어 글을 쓰는 시간보다 먹을 가는 시간이 더 길 수도 있다. 한 줄의 글귀를 완성하기 위하여 글귀의 틀을 구상하고 다듬고 수정하는 시간이 더 길게 소요될 때가 있다. 소설가 박완서 씨는 마흔이 넘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하여 성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일찍 시작했다고 반드시 일찍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다. 얼마만큼 오랜 시간 동안 참고 견디며 얼마나 정성껏 준비했느냐가 중요하다. 집을 지을 때도 땅을 깊이 파면 팔수록 건물의 높이가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생에서 젊은 날은 대팻날을 가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대팻날을 갈지 않고 섣불리 대패질을 하다가는 송판하나 제대로 다듬지 못하게 된다.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아무런 경제적 능력도 없으면서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준비 없이 동거하고 아이를 낳는 젊은이들을 보면 너무나 무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부모가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신중해야 한다. 요즘 준비 없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복권을 사고 도박을 해서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다.

목수로 서른 세 해를 살고 간 예수도 대팻날을 가는 데에 서른 세 해의 시간을 보냈다. 부처가 된 왕궁의 왕자였던 싯다르타도 오랜 고행의 기간을 거쳤다. 법복을 입은 판사나 검사, 머리 깎고 물들인 옷을 입은 출가자, 교회나 성당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들은 그에 맞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성직자나 지도자가 되었으면 속까지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도끼에 물이나 조금 묻히다 말고, 산을 옮긴다고 달라 들어 삽질이나 몇 번 하다 말면 무엇 하나 되는 것이 없는 것은 뻔한 이치 아니런가? 필자가 직장 초년시절 선배 한 사람은 이력서에 직장을 18번이나 옮겨 다닌 이력이 있었다. 순간 이 사람 또 얼마 안 되어 우리 직장도 떠나겠구나! 했는데 이듬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에 들었더니 23번 째 옮겨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 시절은 워낙 인력난이 심했던 시절이라 그런 짓들이 통했지만 지금 같았으면 ‘카멜레온’이라는 별칭의 대명사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 ‘빠삐용’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살인의 누명을 쓰고 지옥의 감옥으로 보내진 빠삐용이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했는데, 재판관은 이렇게 언도(言渡)를 내린다. “네게는 인생을 낭비한 죄가 가장 큰 죄이니라” 참으로 새겨들을 만 한 명 판결문이 아닌가. 누구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태도는 분명 죄가 되리라. 그것은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낭비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거인(巨人)의 족적으로 한 생을 살아간 사람이 있고 주변에 폐만 끼친 채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꿈을 이룬 채 편안히 눈을 감는 사람도 있고 죽는 순간까지 욕망에 매달려 두 눈을 부릅뜨는 사람도 있다. 나는 오늘도 도끼를 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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