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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나의 아저씨-편안함에 이르렀나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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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06  18:2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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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나의 아저씨-편안함에 이르렀나

2018년 3~4~5월의 한 풍경에 드라마 한편이 있었다. 박해영 극본, 김원석 연출, 이선균・이지은 등이 출연한 ‘나의 아저씨’다. 내가 보기에는 대단한 수작이었다. 시청자와 언론의 평도 아주 좋았다. 나는 이런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이 자랑스러워질 뿐 아니라 그것들이 내 삶의 시간을 그만큼이나마 차지해준 데 대해 크나큰 고마움을 느끼곤 한다. 마음속에 남는 잔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뉴스시청이나 SNS 등 기타 쓰잘 데 없는 것으로 허비된 시간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언론에 소개된 대로 이 드라마는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지고서 살아가는 40대의 회사원 박동훈과 그 밑에서 일하게 된 20대의 파견직 여사원 이지안이 사건으로 얽히면서 그 과정에서 서로를 통해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을 통해) 삶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일종의 고품격 휴먼 드라마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은 천차만별로 다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대사, “지안(至安),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라는 것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이런 류의 대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이라고 나는 평가한다. ‘편안함’ 그것이 곧 인생의 궁극적 가치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뜻밖에 이 가치의 소중함을 잘 모른다. 철학에서조차도 특별히 강조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단언하건대, 편안함이라는 이 가치는 철학의 역사에서 거들먹거리는 저 ‘진-선-미’ 못지않은, 아니 인생론적 관점에서는 그런 것들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갖는 중요한 가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가치는 육체적인 것이건 정신적인 것이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즉 불편함 내지 괴로움을 우리가 나 자신의 일로 겪게 될 때,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이 곧바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세상에 몸 편하고 마음 편한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세상 그 어떤 출세도 부귀영화도, 돈도 지위도 명성도, 심신의 편안함이 없다면 그 의미의 거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철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에피쿠로스와 제논과 퓌론의 철학도, (이른바 아파테이아, 아타락시아, 아포니아도) 실은 이 편안함의 지향에 다름 아니었다. 진정한 평안의 저해요인인 욕망들을 통제하라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보다 더 유명한 저 불교도 실은 같은 유형의 철학에 다름 아니었다. 고苦의 원인인 욕망을 제거하여 고가 사라진 경지, 해탈-열반-니르바나 즉 궁극의 평안에 이르자는 철학이니까. 우리가 만일 집에서, 사회에서, 세상에서 진정한 편안함에 이른다면 굳이 머리를 깎고 출가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 불편함-괴로움-힘듦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지난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그 원인의 제공자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극중의 도준영-윤상태 같은 자가 그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극중의 겸덕(윤상원)이 상징하듯이 가장 크고도 강력한 훼방꾼은 어쩌면 자기 자신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우리의 심신은 편안할 날이 없다.

해서 누구는 술을 찾고 누구는 책을 찾고 누구는 친구를 찾고 누구는 종교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 인간들이 기대할 수 있는 구원의 손길은 결국 ‘사람’이다. 사람다운 사람의 따뜻한 마음 한 조각이다. 그것을 저 드라마의 박동훈은(그리고 그의 삼형제와 후계동 사람들은) 너무나도 멋지게 그려 보여줬다. 그것이 저 굳어버린 이지안의 마음을 녹이고 얼굴에 웃음을 되돌려준 것이다.

“그러게 누가 나한테 네 번 이상 잘해주래? 그러니까 당하고 살지…” 이지안은 냉소적으로 그렇게 비아냥거렸지만, 결국은 그 ‘잘해줌’이, ‘네 번 이상 잘해줌’이 답이었음을 저 드라마는 드라마틱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네 번 이상’은 사실 저 성서에서 예수가 말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와 통하는 것이다.) 나는 철학자의 자격으로 이 시대 이 사회의 모든 동류들에게 한번 물어본다. “그대들,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나의 귀에는 “아니요, 아직…”이라는 대답만 들리는 것 같다. 네 번 이상 잘해줄 수 있는 박동훈 같은 그런 사람들을 키워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것이 2018년을 사는 우리들의 삶의 과제다. 아니 모든 인류의 영원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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