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술정리 동 3층석탑 사적지 지정을
창녕술정리 동 3층석탑 사적지 지정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6.2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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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민/체육문화부장

최창민/체육문화부장
창녕 술정리 동 3층석탑은 최소한 782년(선덕여왕 3년) 이전에 창녕 땅에 세워진 뒤 단 한번도 자리를 옮긴 적이 없는 탑이다. 탑의 주인으로 판단되는 '인양사’그리고 이 사찰의 조성비에는 이 시기에 탑이 존재했음을 짐작케 하는 정례석(頂禮石)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가야의 땅이었던 창녕이 진흥왕 이후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면서 찬란하고 화려했던 통일신라의 문화가 이곳까지 팽창하게 된 것이다.1962년 12월 국보 34호로 지정됐다.

이 석탑을 처음 보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데자뷰 현상을 일으킨다. 불국사 석가탑과 너무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높이는 5.75m이며 상륜부의 앙화가 사라진 것을 감안하면 전체 높이는 7,5m, 이는 석가탑의 높이 8,2m보다는 약간 작은 것이다. 탑은 기본적으로 직선을 우선으로 하되 곡선은 아주 절제된 형태로 사용했다. 즉 몸돌과 기단석은 군더더기 없는 직선, 각 층의 지붕 선은 살짝 내리면서 유려한 곡선으로, 처마 끝은 살짝 들어 올려 경쾌한 곡선으로 처리해 ‘절묘한 대비가 조화’를 이룬다.

문화재 관계자들은 “간결하고 장중하며, 안정된 균형미를 보여주는 국내 최고의 명품 석탑이다”며 “석가탑에 비견할 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박준식교수(계명대)가 펴낸 ‘신라석탑의 예술세계’에 따르면 ‘석가탑을 건립한 석공의 솜씨일수도 있다’고 했다. 석탑의 아름다운 면모를 볼 수 있는 지점이 따로 있다. 정면 오른쪽 약 45도 지점에서 바라보면 그야말로 매끈하게 잘 빠진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세월의 무게만큼사건도 많았다. 1964년 문화재 관리국직원을 사칭한 도굴꾼들이 석탑을 도굴하려던 찰나, 주민들의 신고로 화를 면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자잘한 사건들은 많았다. 시골 할머니들이 이곳에 마늘이나 양파 등을 까서 말리기도 하고 옷을 널어 말리기도 했으며 심지어 노숙자들의 근거지가 되거나 투전판이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비구니승 혜일 스님이 등장한다. 스님은 ‘명색이 국보라는데 이렇게 방치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노숙자를 설득하고 아이들이 탑에 올라가는 것을 제지했다. 이때마다 스님은 이들로부터 숱한 공박을 당했으나 굴하지 않고 이 일을 지속했다. 이뿐이 아니다. 복원과정 중에 수습됐던 사리장엄구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을 알고는 이를 추적해 세상 빛을 보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녕술정리 동 3층석탑은 아직까지 국보의 위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철제문을 열고 들어가 탑기단에 앉거나 탑신에 기어 올라갈 수도 있으며 심지어 탑을 돌이나 망치로 두드려 훼손할 수도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 불국사의 석가탑 다보탑처럼 탑 주변에 돌난간 등 인위적인 접근을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또 있다. 김량한 창녕향토사연구회부회장은 ‘잔디’가 문제라고 했다. 잔디가 밤새 내린 이슬을 머금고 또 석탑이 습기를 흡착하게 되면, 햇빛에 노출되면서 증발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이 지속적으로 발생해 탑의 부식상태가 가속화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석가탑이나 다보탑처럼 돌난간을 설치하고 흙을 깔아야한다고 주장했다.

더 심각한 것은 석탑이 동북쪽으로 기울었다는 것. 이렇게 된 데에는 65년 해체 복원 시 지대석 밑에 부어 넣은 시멘트가 원인이라고 한다. 이 외 상륜부를 복원해 국보의 지위를 찾아줘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지자체에서 이 지역을 공원화 하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석탑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지역을 공원화할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황룡사지나 정림사지처럼 사적지로 지정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오래토록 보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자체나 문화재 당국이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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