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나쓰메 소세키 ‘풀베개’-지·정·의
아침을 열며-나쓰메 소세키 ‘풀베개’-지·정·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7.04 18:3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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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나쓰메 소세키 ‘풀베개’-지·정·의


“지성에 주력하면 모가 난다. 정에 치우치면 휩쓸려버린다. 고집을 관철하면 거북해진다. 어쨌거나 인간세상은 살기 힘들다”(知に働けば角が立つ、情に棹さおさせば流される、意地を通せば窮屈だ、とかく人の世は住みにくい。) 

일본근대문학의 한 최고봉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풀베개(草枕)’ 첫머리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일본사람들이 엄청나게 아끼는 작가고 엄청나게 좋아하는 문구다. 나에게는 일본어를 배우던 때의 한 추억이기도 한데, 인생살이를 하면서 문득문득 실감하는 진리이기도 하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백 명의 실로 다양한 인간군상을 겪으면서 이 말의 확고한 진리성을 아프게 확인하곤 한다.

소세키가 철학공부를 했는지 어떤지는 따로 조사해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이 말이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정신의 3대 요소, 즉 ‘지-정-의’[이성-감정-의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인간의 존재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신비로 가득 차 있는데, 육체와 함께 그 절반을 이루는 정신이라는 것이 이런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정말이지 오묘하기 이를 데 없는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겪어보면 사람들은 대체로 이 셋 중 어느 하나 에 치우쳐 있어 이런저런 문제들을 드러낸다. 그것으로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한다. 세 가지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원융한 인품을 보여주는 이는 뜻밖에도 참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내가 아는 후배 A는 독일에서 학위를 했는데 정말 우수한 학자가 되었다. 예를 들면 철학자 누구의 무슨 개념이 전집 제 몇 권 몇 페이지 몇째 줄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꿰뚫어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그런 지식들을 (부분적으로는 아무래도 좋은 지식들을) 거의 절대시하면서 그것을 공유하지 않는 동료들에게 상처를 줬고 결국은 그 자신이 모난 사람으로 평가되면서 왕따를 자초했다. (일본 학회에 가보면 이런 풍토는 더욱 심해 거의 살벌할 정도로 사람을 긴장시킨다.) 이른바 ‘지식’의 상당 부분은 사실 몰라도 아무 상관없는 ‘잡학’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내가 아는 어느 동료 B는 자신의 술친구 C와 어찌나 정이 깊던지 그 친구가 저지른 엄청난 비리가 드러나 결국 해임을 당했는데도 끝내 그 객관적 사실조차 외면한 채 그 친구의 편을 들어주고는 했다. 결국 그도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고 말았다. (‘유유상종’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같은 깃털의 새들이 함께 무리 짓는다)’를 확인시켜준 사례다) 술로 쌓은 정도 과연 정에 속하는 것일까?

또 내가 아는 한 선배 D는 내가 보기에도 대단한 수준의 학자인데 그의 관점 내지 해석에 몇 가지 명백한 오류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것을 완곡하게 지적해주었는데, 그는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꺾기는커녕 내가 그것을 지적한 이후 오히려 더 고집스럽게 그 해석을 내세우고 있다. 참으로 갑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지와 고집이 다름을 그는 과연 생각이나 해본 적이 있을까? 그런 딱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고집은 오만과 편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런 사례가 어디 하나둘인가. 세상엔 그렇게 모난 사람, 그렇게 휩쓸리는 사람, 그렇게 갑갑한 사람이 차고 넘친다. 우리 한국은 특히 그렇다. 내가 아는 학계도 정치계도 언론계도 다 마찬가지다. 물론 제대로 된 이성, 제대로 된 감정, 제대로 된 의지는 그것 단독으로도 하나의 위대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에게도 다른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있음을 우리는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 세 가지가 어우러져 비로소 하나의 정신,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원융한 인간을 지금 여기서 기대하는 것은 헛된 꿈일까? 오늘도 나는 정신이 고장난 주변의 어떤 E와 F 때문에 마음이 몹시 아프다. 이래저래 인간의 세상은 살기 힘들다…역시 진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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