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당신도 외로울 때 동사무소에 가나요?
동사무소에 가자/ 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 /외로울 때는/ 동사무소에 가자/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어제 죽은 사람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곳//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전생이 궁금해지고/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 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 짧은 질문을 던지지/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는 그 질문이 없는 곳/ 그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에 가자 //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라든가 / 그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 자꾸 생각하게 될 때/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거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을 때/ 왼발을 든 채 /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자/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명료해 /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고/ 왼발을 들고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시를 읽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시의 내용뿐 아니라 시어에서 오는 말의 울림에서도 그런 힘이 작용한다. 만약 이 시에서 동사무소가 아니라 주민센터라는 말이 쓰였다면 시의 울림이 훨씬 덜 했을 것이다. 동사무소는 디지털보다 아날로그에 더 가깝고 우리 삶의 비애와 일상의 자잘한 관계들에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동사무소를 이렇게 울림이 쓸 수 있구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랄까. 열두 번을 동사무소에 갔다 오고 네 시간을 앉아 있더라도 이런 시를 쓸 수 없을 것 같아 애가 타도록 부러웠다면. 그럼에도 이 시는 우리의 일생이 동사무소의 서류 한 장으로 시작해서 끝난다는 것을 위트 있게 말하고 있다. 태어남과 죽음을, 누군가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또 헤어짐을, 내가 이동한 삶의 거처와 같은 일생의 흔적들이 간결하게 서류 한 장에 정리된다면. 우리는 ‘동사무소란 무엇인가’라는 저 질문의 언저리에서 한참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어제 죽은 사람이 아직 떠나지 못하는 곳, 우리의 전생이나 공중부양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 밥을 잘 챙겨 먹는지 오늘은 어떤 일에 마음이 다쳤는지 아무도 그런 사소한 일상을 묻지 않는 곳. 시작과 끝이 완벽하게 간결하고 명료한 동사무소를 나오며 마음이 쓸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왼 손과 왼 발을 들고 외로운 고양이처럼 동사무소를 나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명료하고 간명하게 정리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을 지나칠 때 아득한 그 무엇이 문득 밀려오는, 대책 없는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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