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의령군 출신 항일투사 안균
진주성-의령군 출신 항일투사 안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7.18 18:52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의령군 출신 항일투사 안균


항일투사 안균(1905~1946년)선생은 참봉, 돈녕부 도정 안종환의 손자이며 안정로의 차남이다.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출신인 안균(安均)선생은 1907년 전국에서 펼쳐진 국채보상운동 때 5원을 의연했는데 부친이 대신 지불했다.

1924년 의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북해도 농대를 졸업했다.

의령보통학교 재학 중 입산소년회가 조직되자 동참하고 총 간사로 활동했다. 의신학교를 건립할 때 240냥을 기부했다. 1927년 10월 부림농민조합의 권리를 위해 투쟁할 때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되어 석방되었다.

1928년 여름 방학 때 의령유학생 강연단을 조직해 안상록. 안영제 등과 함께 애국 강연을 실시했다.

1929년 10월 낙동농민조합을 설립하기 위해 임시대회를 개최하였으나 곧 일경에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로 올라가 고학당(苦學堂)에 들어가 교사로 근무할 때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안균 선생을 농민조합대회가 문제가 있다면서 예비 검속했다.

1930년 6월 석방했다가 김광휘, 정홍석 등 수십 명을 체포하고 학생들까지 잡으니 종로경찰서가 차고 넘칠 정도가 되었다.

1930년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 모친 전의 이씨의 별세 소식을 들었으나 일경은 석방해 주지 않았다.

1932년 2월 의령농민조합 소속으로 활동중 마산경찰서에서 찾아와 피체되었으나 한 달 만에 석방되었다.

또 1932년 8월 일경에 피체되었고 애국동지 4명과 함께 피체되어 엄중한 조사를 받고 30여 일만에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의령농민조합은 해산되고 추후 일체 간여하지 않느다는 서약서를 쓰고 4명과 함께 석방되었다.

이 때 안균 선생에게 적용된 혐의는 조공주의자협의회 산하 적색농민조합 낙동 대표라는 이유를 붙였으나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광복 후 경남인민위원회 노동부장이 되고 위원장이 되었고 민선으로 의령군수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