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의령 3·1운동 이철익(李喆益)
진주성-의령 3·1운동 이철익(李喆益)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7.25 18:5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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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의령 3·1운동 이철익(李喆益)


이철익(1891~1950년)선생은 경남 의령군 봉수면 천락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4일 의령읍 3·1운동 때 시위 군중의 선두에서 지휘하다 일경에 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혼절했다.

의령읍 3·1운동은 구여순 선생이 상경하여 친족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구여순 선생이 의령읍 장터 가설 단상에 올라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의 기반을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때가 되었다. 이 때를 놓치지 말자”라고 외치고 남인섭 선생도 눈물로 호소하며 시위 동참을 외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학생 시민들 3천여 명이 운집했다.

의령읍내를 행진하고 경찰서 인근에서 각자 흩어졌다.
다음 날인 15일에도 의령향교 앞으로 다시 모이게 하니 1천 5백 여 명이 운집하였고 16일에도 시위를 전개했다.

이철익 선생은 일경에 검거되어 유치장에 감금(監禁)된 채 혹독한 고문을 받고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고 석방되었다.

일부 기록에는 신반장터에서 시위를 전개했다고 전해 온다.

고문후유증으로 고생하고 강원도 철원으로 이주해 탄광에서 일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는 일제가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마을 친일파들을 시켜 강원도 탄광으로 이주해 살도록 유도함에 따른 것이다. 탄광을 벗어나 만주지역으로 망명해 살았다.

필자가 9년 전 신분장지문회보서 한 장을 들고 부산에 사는 손자 이순갑. 서울에 사는 이순열을 찾아다니며 명예회복을 설명하지만 처음에는 믿지 않았고 서로 미루는 실정이었다.

필자가 공적서. 이력서 등을 작성해 의령군지 복사물을 들고 서울 남부보훈지청을 찾아가 서류를 제출하고 1년간 기다린 결과 2013년 8월 광복절에 손자가 대통령 표창을 받게 해 드렸다.

손녀 이옥남, 이순남이 있고 의령군 부림면 신반 공원에 기미년 3·1운동 기념비가 1990년 8월 15일에 세워졌고 2013년 12월 8일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08-02-190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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