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유정법(無有定法)
무유정법(無有定法)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3.28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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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숙/시인

어느 한 모임에 참석했더니 마침 회칙을 개정하고 있었다. 개회 및 의결 정족수에 관해, 일반회의를 “위원의 과반수 출석으로 한다.(단, 참석인원의 2/3 이상 찬성으로 진행할 수 있다)”에서 이 단서 조항을 “(단, 참석인원의 과반수 미만일 경우 참석위원 2/3 이상 찬성으로 진행할 수 있다)”로 개정안이 나와 있었다. 총무는 ‘회칙 신규 대비표’를 준비한 안(案)대로 읽고 회장은 가부 여부를 한번 묻고 60명이 넘게 모인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나는 ‘참석인원의 과반수 미만일 경우’에 딱 걸려있었다. 몇 번을 읽어도 그 상황이 이해가 안 갔다. 무슨 개정안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었느냐고 손을 들고 해설을 부탁하려는데 이미 개정안은 원안대로 통과가 되어버린 후였다.


아무리 어려운 글이라고 자꾸 읽다보면 뜻이 절로 나타난다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만 믿고 10분이 넘도록 이 한 줄을 읽으며 생각했다. 그러자 명언(名言)은 정말 신기하게도 자기가 지닌 은밀한 진가를 드러내 보여줬다. ‘참석인원이 과반수 미만일 경우’로 ‘의’를 ‘이’로 바꾸자 그 의미가 한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때부터 였다. 이걸 말하자니 “우린 이미 그렇게 다 이해하고 있었다”거나 “뭐, 토씨 하나 틀린 걸 가지고” 라며 트집 잡는다고 할 것 같아 말하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게 총칙 개정안이라 짚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참석인원의 과반수 미만일 경우’에 대해 개정안을 읽어가는 도중에 총무에게 바로 질문을 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그가 ‘의’를 ‘이’로 바꾸라 실무자의 착오였다는 즉답을 할 수 있었을까. 다른 안건을 놓친 10분이 좀 아깝긴 해도 준비한 여러 입장과 바꿔 생각해보니 그래도 혼자 끙끙거리길 잘했다 싶었다. 이 덕분에 문리(文理)가 트인다는 옛 말의 의미도 그 맛의 달콤함도 알았다.

장소를 바꿔 저녁을 먹으러 가는 도중에 팔순을 바라보시는 한 어르신이 내 손을 꼭 잡으시며 “잘했어! 참 잘했어! 회칙에서 글자 한 자는 얼마나 중요한데”라며 동석(同席) 할 것을 제의했다. 개인적으로 각별한 관계인 실무진의 안면을 보면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되는데 그런 걸 까칠하게 꼭 짚어내느냐고 말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참 고마웠다.

순간, 4월 11일은 국회의원 총선이 떠올랐다. 누구를 위해 어떤 법을 어떤 문장으로 만들어서 보여줄 사람을 우리가 뽑을 것인가. 이는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에는 역사라는 큰 강물의 흐름을 배제할 수가 없다. 입법 과정에서 글자 한 자를 ‘의’로 써 주느냐 ‘이’로 써 주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법이란 누가 어떻게 써주느냐에 따라 읽어가는 그 자리에서 상호간에 이해와 소통이 바로 될 수도 있고 읽으면 읽을수록 더 아리송해 짜증만 날 수도 있는 것이다.

명의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이라고 설파했다. 이 말은 통하면 안 아프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뜻이다. 어찌 우리 몸에만 이 말이 적용 되겠는가. 정신세계나 인간관계나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는 나침반이나 다름이 없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한 상에서 마주 앉아 밥을 먹어야 하는 괴로움을 누구나 한두 번씩은 겪었을 것이다. 그걸 안다면 이번 선거는 각별히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원래 정해져 있는 법은 없다(無有定法). 법은 우리가 만들어 정하기도 하고 개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국민교육 헌장의 가르침과는 달리 ‘나라의 발전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지금 우리 농촌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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