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의 詩 산책-쉽게, 시를 쓸 수 없다! 투쟁하는 거리에서
김지율의 詩 산책-쉽게, 시를 쓸 수 없다! 투쟁하는 거리에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8.21 18:20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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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쉽게, 시를 쓸 수 없다! 투쟁하는 거리에서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 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닷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중략)/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송경동, ‘사소한 물음에 답함’)

이 시를 쓴 송경동 시인은 행동하는 시인이다.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반대 운동과 한미 FTA 반대운동,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용산참사 시위 등의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물론 김진숙의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현장에도 그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의 버스’를 기획했다.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포클레인 붐대에서 고공농성을 하다 떨어져 다섯 달 동안 누워 있었으며, 체포와 투옥을 오갔던 시인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묻는다. 진실로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한 맑스주의자가 시인에게 어느 조직에 가입되었냐고 했을 때 그는 말한다. 나는 맑스주의자도 조직의 일원도 대학출신도 아닙니다. 조국해방전선에 동참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이고, 노동자 출신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 어느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고.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그가 공산당 선언 이후 집필한 미완의 대작인 <자본론>의 핵심적 비판에 있는 자본, 그것은 영구운동 중이며 맑시즘은 더 나은 진보적 상상력과 더 많은 변혁으로 언제나 열려있다. 하지만 많은 조직들은 그 속에서 또 다른 계급과 투쟁을 만든다. 그 투쟁 역시 학벌과 조직의 힘으로 또 다른 억압을 만들고 구성원들을 서열화 시킨다.

불구인 체제에서는 불구의 문학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시인은 말한다. 문학의 뿌리는 아픔, 절망, 고통에 닿아 있어야 하고 자신이 노동한 만큼 최소한의 대우를 받는 것 그리고 거기에 맞서 나가는 것이 노동문학의 지향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졸과 소년원 출신과 노동자 출신인 시인에게 조직은 의미가 없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는 ‘맑스주의자’의 말에 그는 처음부터 동의할 생각이 없다.

시인은 어디에도 가입되지 않은 단독자이며 부당한 조건에 저항하는 자이다. 이론이나 조직보다 양심과 행동이 먼저이다. 크레인 위에서 용산에서 소년원과 감옥에서 그가 목숨을 내놓고 부딪친 그 모든 것에 비하면 이 시에서 ‘맑스주의자’가 묻는 물음은 아주 사소한 지극히 사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 대신 그는 저 바다물결과 꽃잎들 앞에,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더 큰 무엇을 배우고 있을 뿐이다. 더 열심히, 더 외롭게, 더 당당하게 사는 것이 더 낮고 정직하게 사는 이들에게 보답하는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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